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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s/reading

부분과 전체

by edino 2009. 5. 10.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역시 고전은 읽는데 시간이 걸린다. -_-;

이 책의 쟝르(?)를 어떻게 구분하면 좋을까...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위주로 풀어간 자서전적인 비망록 정도로 정의하면 될까?

책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름 인터넷에서 떠도는 유명한 사진 한장 보고 가자.


1927년 Solvay회의 참석자들의 무시무시한 포스.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마담 퀴리, 슈레딩거, 보어, 막스 플랑크, 로렌츠, 파울리, 보른, 윌슨(안개상자), 콤프턴, 드 브로이, 폴 디락 등등... 이 사진의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받았거나 받게 된다. 얼핏 물리학 전체 역사의 1/3쯤은 여기 다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도 난다. 당시 하이젠베르크 주변에 넘쳐나던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 누구라도 기록하고 싶을 법 하다.

책은 20개의 장으로 나뉘어, 크게 보면 시간 순으로, 물리학을 중심으로 하지만 제법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스무살 무렵이던 1920년대의 대화들이 첫 장이다.

뭐랄까, 이책을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이 시대만큼 지적인 열망이 넘치던 시기도 흔하진 않은 것 같다는 것.
90년대 중반 학번인 우리때만 해도 그다지 지적인 분위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실용 지식만 강조되는 요즘의 대학 풍경은 그때보다도 더 비지성적으로 느껴진다.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없는 주제의 이야기들로 날밤까던 풍경들이 지금이라고 없지야 않겠지만, 아무튼 하이젠베르크와 그의 친구들의 대화는 그시절의 대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지적인 분위기라는 것이 마냥 딱딱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낭만도 그런 분위기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이 즈음 하이젠베르크는 길을 가다가 낯선 청년에게서 젊은이들이 프룬성(城)에 모인다는 얘길 듣고 그곳에 참석하였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전후의 세계에 대해 자발적으로 연설과 토론을 하고, 달밤이 되자 어느 놈은 바이올린을 들고 나타나 바흐의 샤콘느를 연주하고, 모닥불을 피워놓고 음악과 재담으로 밤을 지새던 풍경에 대한 묘사.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난 놈들은 학문과 예술에 투신을 하지, 고시를 보거나 의대를 가려고 눈이 벌개지진 않았을게다.
(그래봤자 나도 물리학과 가면 밥굶을까봐 하필 공대로 간 어이없는 인간이다. ㅋㅋ)

젊은 시절 나눈 대화까지 상세히 적어놓은 것은 반드시 '우리땐 대학가기 전부터 이런 어려운 얘기하고 자랐어 이거뜨라~' 뭐 이러려는 건 아니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주제 같아도 그의 물리학적 성과나 그의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친 바가 있는 대화 내용들이 많다. 저 위 사진을 봐도 그렇지만, 역시 주변이 받쳐줘야 인물도 난다고나 할까. ㅎㅎ

하이젠베르크가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하는 과정만 봐도 그렇다. 수학을 전공하려다가 면담한 교수의 반응이 삐딱해서 실망하고 있던 차에, 아버지가 다리를 놔줘서 잘나가는 물리학 교수 조머펠트와 면담 후에 제자로 들어가고, 거기서 만난 같이 공부할 학생이 볼프강 파울리다. 그러다 또 조머펠트가 다리를 놔줘서 같이 연구하게 된 사람이 닐스 보어.. 뭐 대표적으로 몇 명만 꼽아도 이정도다.
(Lesson 1) 역시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저 시대는 저런 지적 풍토 이외에도 물리학에 있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때와 같다. 사실은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조차 정설로 굳어진지 100년도 안지난 때이다. 이즈음 발견되고 관찰된 여러가지 현상들은 물리학상 발견들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이때 피어난 물리학 연구의 성과들에 위의 쟁쟁한 인물들의 천재성이 기여한 바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덜한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직접적으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지 못했더래도 조만간 포앙카레나 로렌츠에 의해 정식화되었을 것이고, 오토 한에 의해서 우라늄 핵분열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몇년 후면 페르미나 졸리오가 발견했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즉, 이때는 우연히 물리학의 천재들이 유달리 많이 태어나 활동하던 때가 아니라, 물리학적 발견이 풍부할만한 발달 과정상의 단계였다고 보는 편이 맞다는 얘기다.
(Lesson 2) 사람은 때를 잘 타고나야 한다.

천재의 대명사와도 같은 고유명사 아인슈타인일지라도,
2,30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적어도 이토록 유명하진 않았으리라.

또 이 책에서는 특히 물리학에서의 '이해'란 개념에 대해 여러 차례 논의하고 있다.
'이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논의들을 보면서 왜 현대물리학이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정리되지 않은 많은 관찰 결과들, 현상들이 있다. 무지 똑똑한 인간들이 그러한 현상들을 아울러 설명할 수 있는, 때로는 어떤 현상들을 예언까지 할 수 있는 멋진 수학적 공식이나 모델들을 도출해낸다. 이제 그 수학적 공식이 가지는 함의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의 세계, 즉 인간 경험의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 상대성이론이든, 양자역학이든, 각종 소립자 물리학이나 천체 물리학은 인간 경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세계를 다룬다. 이 영역에서 물리는 고전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현상들을 보이고, 그럼에도 이들은 고전물리학의 잣대들을 사용하여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이론은 그 존재 자체도 상상하기 어렵지만,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증명할 수 없으므로.) 그 수학적 모델의 함의에 대한 '그럴싸한' 어떤 설명들은 아인슈타인이 수학적 모델에 얼추 동의하면서도 그 함의에 동의하지 못할 만큼 낯설기까지 하다. 그런 걸 수학도 못 쫓아온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킨다는 것은 mission impossible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절대로 쉽게 풀어 쓴 현대물리학이라는 책광고에 속지 말자. 수학 공식이 없으면 진정한 '이해'도 없다.

그리고 물리학자라고 인간도 아닌 건 아니다. 11차원, 26차원을 얘기한다고 그들 눈에 그런 차원이 보일 턱이 없다. (이 책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이론에 다가가는 모습을 보기 전까진 나도 천재 물리학자들에겐 이런게 머리속에 그냥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도 인간의 것인 이상 평균적인 인간들이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에 구속되어 있다. 그리고 그 언어는 인간의 경험 세계에 붙잡혀 있다. 단지 설명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이해'를 위해서도 현대물리학은 고전물리학으로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현대물리학이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냥 shut the mouth 하고 있어야 할 영역이고, 그러한 영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인 이야기다. 지난번에 포스팅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묘하게 겹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수학적 모델링의 단계에서 인간은 종의 한계로 말미암아 매우 많은 정보들을 버려가면서 겨우 '이해'라는 말을 쓰려고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이라 할만한 발견/이론이 실생활이 아닌 인간의 사상과 철학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나 생각을 해보면 의외로 그 유산은 초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니체나 다윈이나 마르크스나 프로이트같은 선수들의 이론은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떠나 인간의 경험세계에서 '이해'가 가능한 만큼, 이론의 혁명성만큼 많은 논란과 영향을 미쳤지만, 현대물리학은 이 '이해'가 문제시되는 영역이다. 결국 다른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엔 너무 '난해한' 영역일 수도 있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현상이고, 그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수학이라는 사실도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우겨봤지만, 조금 더 배짱좋게 생각했으면 '신은 엄밀한 수학적 확률이 지배하는 주사위 놀이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아인슈타인 입장에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더욱더 도전적인 문제 설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놀라운 질서 속에 숨어 있는 불확실성, 그 불확실성을 지배하는 질서. 이렇게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또 있을까? 탄력 받아서 물리학 책을 마구 파보고 싶다가, 어차피 온전한 '이해'까지는 어려울 것 같아 참는다. 그냥 전에 있던 상대성 이론 책이나 한번 더 들여다보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자.

Hitler : 나에게 원자폭탄을 만들어줘.
Wittgenstein : 우쥬 프리즈 닥쳐줄래?

그 밖에도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있지만 미국의 실용주의적 과학관 내지 공학적 접근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 같은 얘기를 다룬 한 챕터도 기억에 남는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처럼 땡깡을 부리지 않고 새로운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적 성향에 대한 이야기들이 처음엔 칭찬인 듯 싶다가, 나중엔 무쟈게 까대는 걸로 끝나는 대화다. 뭐 미국놈들은 얘나 지금이나 좋은게 좋은거다 주의고, 독일놈들은 원칙에 목숨거는 것들이고.

그 외에 많이 다뤄지는 얘기는 역시 두번의 세계대전을 둘러싼 이야기들.
특히 2차대전을 앞두고 이탈리아의 페르미와는 달리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독일에 남는 선택을 한 하이젠베르크의 '자기변호'도 꽤 길게 다뤄진다. 의외였던 것은 오토 한의 우라늄 핵분열 발견 직전까지 원자력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물리학자들이 상당히 무지했다는 것. (이때에도 SF 소설에서는 원자폭탄이 다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우라늄 핵분열 발견 이후에도 하이젠베르크를 위시한 독일 물리학자들은 종전때까지 핵에 대해 매우 나이브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나찌의 지시에 의해 핵분열을 연구하면서도 자신들은 평화적 이용에 쓰일 정도까지만 핵을 연구하고 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독일은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자원을 투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위하였다. 심지어는 독일의 점령하에 놓인 덴마크에 보어를 찾아가 자신들을 이해시키고자 하였으나 보어가 핵무기 개발 자체에 충격을 받아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식으로까지 말하고 있다. 심지어는 연합군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미국이 일본에 핵을 투하한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이 얘기한다. 이 순진한 태도는 뭐지?

실제로 하이젠베르크의 성향은 전체주의와 그렇게 멀어 보이진 않는다. 2차대전 이전에 1차대전 당시의 독일에 대해 보어와 얘기하면서도 독일을 옹호하는 쪽이었고, 책의 몇몇 군데에서 명시적으로 옛 프러시아주의에 대한 향수를 숨기지 않는다.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독일에 남은 이유도 전후 독일의 재건을 위함이라고 얘기할 정도이니, 독일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 않았던 듯 싶다.

이야말로 내가 항상 마음속으로 경탄해 마지않았던 저 옛날의 프러시아주의, 즉 규율과 질서와 과언(寡言)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좀더 부끄러운 에피소드들은 숨기고 떳떳한 일화들은 더 드러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래서 이런 에피소드도 얘기하고 있다. 전쟁 당시 베를린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것으로 독일 고위인사들과의 모임을 들기도 했는데, 왜 굳이 이런 모임 얘기를 꺼냈을까 보니 그 모임에 참석했던 상당수가 후일 히틀러 암살 작전 실패로 죽거나 체포된다.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발키리 작전이 바로 그 사건이다.

물론 여러 정황상 하이젠베르크가 나찌를 나서서 옹호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제법 명확해 보인다. 본질적으로는 나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이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특히 전쟁과 관련된 그의 언행들이 마뜩치는 않다. 번역자는 후기에 페르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망명을 하지 않고 독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숭고하다고까지 표현했는데, 나와는 전혀 다르게 그를 평가한 셈이다.

말 나온 김에, 사실 전공자도 아닌 역자의 번역은 그다지 매끄럽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1981년 번역본 그대로인지 성의가 좀 없는 듯도 싶고...
역자 약력을 보니 교수 신분으로 해직과 복직을 반복한 이력이 있어 찾아보니, 역자 김용준 교수는 함석헌 선생의 제자이자 도올 김용옥의 맏형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어쩌면 그 시대 역자의 처지가 하이젠베르크의 행동을 나와 다르게 평가하게 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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