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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s/reading

작은 것이 아름답다

by edino 2009. 3. 6.

E.F.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1973년에 발간되었으니 벌써 35년이 넘었다.
이 번역본도 99년판이니 표지나 편집도 꽤 낡아 보이고, 현재의 시점에서는 다소 진부한 얘기들을 하고 있지 않을까, 아마도 옳지만 당위만을 얘기하고 있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편견으로 인해 오랫동안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런 선입견은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었다.

부제인 '인간 중심의 경제학'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슈마허는 본래가 경제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인물인지라,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논의보다는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5년전에 나왔음에도 바로 지금에 대한 얘기와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그때도 심각했던 많은 문제들이 지금은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더 심각해졌을지 짐작케 한다.
당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실행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지만, 다만 그러한 체제 변환이 어떠한 동력으로 이행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결국 당위에 기대고 있을 뿐인 것으로 느껴진다.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갔다가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에서는 억류되기도 했었고, 전후 독일 점령 영국 관리위원회의 경제고문으로 베를린으로 귀향하여 독일인으로부터는 백안시당했다는 그의 이력이 그의 이후 행보나 사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책은 잠언과도 같은 구절들이나 인용문들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덜 졸리게 볼 수 있었다.

오늘날 경제 질서가 무너지고 그 개혁안도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반 사람들도 영혼을 지니고 있는 이상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제도에 상처받은 자존심이나 빼앗긴 자유는 보상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가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 R.H.토니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융성>

안타깝게도 지금의 경제위기에 대한 거시적 차원에서의 대응의 초점은, 불합리하고도 무력한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개선보다는, 기술적으로 어떻게 피해를 최소화하고 되돌릴 수 있을까에만 맞춰져 있다. 사실 그정도의 노력이란 것도 다른나라 얘기고,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들의 합은 방치보다 조금 더 나쁜 수준에 가깝지 않을까. 이런 분위기에서는 누구라도 살아남기 위한 매뉴얼로서 경제에 대해 알아야 겠다는 생각들이 많이 들지 않을까. 그중 또 상당수는 IMF 학습효과로 인해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잘 넘기고 떼돈을 벌어볼까하는 고민을 할 것이고. 사회적 안전장치란 것도, 전망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 이런 체제는 인간의 탐욕을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본능을 자극하여 탐욕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사회가 아닌지.
이런 분위기에서 위의 인용문같은 근본적인 이야기는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우리가 현실로부터 유리되고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마르크스도 이른바 '노동가치설'을 정식화할 때, 마찬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본의 대부분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해 자원을 자본으로 다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며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에 대해 짤막하게 비판한 부분이다. 사실 위의 얘기는 핀트가 좀 안맞는 비판이라고 여겨지지만, 슈마허의 이념적 성향은 몇년전 잘 팔리던 짝퉁이 아니라 original 제3의 길이라 불릴만 할 듯하다. 중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간디는 언제나 "그 밑에서는 누구나 善人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제도를 꿈꾸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여 배척했다.

'인간 중심의 경제학'이란 말에는 for human 뿐 아니라 by human의 의미도 강하게 들어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 중심' 혹은 '인간 위주' 라는 말에 by human의 의미가 강할 수 있다는 것을 몇달 전에야 깨달았다. system 중심적인 접근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그런 것이 슬로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었지만, 이 책에서 그런 견해를 다시 만나고 보니 지나친 system 중심적인 접근도 확실히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지를 구하려면, 지금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탐욕과 질투심을 버려야 한다. 버린 순간 찾아오는 조용함은 - 오래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예지로 충만한 통찰을 부여하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의 탐욕과 질투심을 약화시키고, 사치품을 필수품이 되지 않도록 하며, 현재의 필수품을 점검하여 그 수를 줄이거나 질을 간소화시키도록 한다. 가령 이 가운데 한 가지도 실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영속성을 보증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경제적 '진보'를 칭찬하는 일을 중지하고, 별난 사람이라고 비난받을까봐 두려워하지 말며, 자연보호론자나 생태학자, 야생 동식물보호론자, 유기농업 추진자, 유통 제도 개혁자, 촌락의 소공업주, 비폭력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원조와 지지를 보낼 수는 있지 않을까. 백 가지 이론 보다 하나의 실행이 귀중한 것이다.

따르도록 하자.

세계를 어떻게 체험하고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의 질에 의해 현저히 좌우된다. 그 관념이 빈약하고 피상적이면 그 사람의 삶도 생기가 없고 매력이 없으며, 비소하고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거기서 생겨나는 공허감은 견딜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터무니없이 거창한 정치적 관념이 나타나 갑자기 모든 것을 밝게 비추며 삶에 의미와 목표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경우, 유감스럽게도 정신의 공백은 간단히 그에 의해 메워져 버린다.

확실히 독일 지식인들에게는 나찌의 경험이 매우 강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듯하다. 제대로 군국주의를 반성해본 역사를 가지지 못한 일본이 더욱 일천하게 느껴지는, 비교되는 지점이다. 세계적 경제위기와도 겹친 현재에는 더더욱 경계해야 할 것들을 경고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새로운 관념, 사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그 포로가 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러한 관념, 사상이 언어를 포함한 커다란 사상군의 일부가 되고, 그것을 '암흑시대'에 스스로의 정신 속에 받아들인 3대나 4대째의 자손은 그 포로가 되어 버린다.

요즘 기준으로는 3, 4대째 까지로 보는 것은 너무 길지만,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맥락의 경고로 읽을 수 있다.


버트란드 러셀은,.... "앞으로 영혼의 서식처를 안심하고 구축할 수 있는 토대는 절망에 굴하지 않는 태도일 뿐"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이 인용은 슈마허가 동감으로 끌어다 썼다기 보다는 개탄에 가까운 어조로 끌어다 쓴 것인데, 사실 내게는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늘어놓은 얘기들이 내 유토피아에 더 가깝다. 독일인은 유토피아를 얘기해도 빡세게 느껴진다. -_-;
뭐 그냥 러셀 얘기를 하길래 옮겨와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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