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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s/reading

암살주식회사

by edino 2009. 10. 24.

잭 런던의 암살주식회사의 원제는 The Assassination Bureau, Ltd. 이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르나, 요즘 회사에서 재무관련 수업을 듣고 있는 영향인지 암살주식회사라면 설마 상장한 회사인가, 이것은 번역하면 암살 유한책임회사 아닌가, 과연 소설 속 이 조직이 유한책임회사의 형태인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뭐 Bureau, Ltd.라니 책 안에서는 암살국이라는 번역도 쓴다. 이후 스포일러(?) 있으니 유의하시라.

왠지 책 커버 디자이너가 책을 제대로 안읽어본 것 같아. -_-;

어쨌든. 이 책은 제목도 흥미롭지만 그 태생은 더욱 흥미롭다.
노동하듯 쓰기를 지속하여 다작으로 소재가 고갈되어간 잭 런던이 1910년 무명작가 싱클레어 루이스로부터 70달러에 구입한 14편의 시놉시스 중 하나를 가지고 쓰기 시작한 것이 암살주식회사이다. 잭 런던은 이 플롯을 구입하고 3개월여만에 2만단어 분량을 써내려 간 이 작품의 결말을 고민하다 집필을 중단했고, 결말을 위한 짧은 메모만 남긴채 사망했다.

이 판본은 '도망자' 시리즈의 스릴러 작가 로버트 L. 피시가 1963년에 미완성 부분에 자신의 창작을 더하여 낸 판본이다.
독자는 위 문학동네 판본을 차례대로 읽으면, 다 읽고 나서야 어디서부터 피시가 쓴 부분인지 알 수 있다. 대략적으로 얘기하자면 2/3 정도는 런던이, 나머지는 피시가 썼다. 그리고 원 시놉시스 구상은 루이스이니 세사람의 손길을 거친 작품인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소설의 흥미로운 부분은 너무 금방 끝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니체의 초인을 구현해놓은 듯한 드라고밀로프가 삐리해보이는 예비사위에게 설득당하는 부분은 거의 생략되어 있어서 독자에게는 별로 설득력이 없고, 그후 자신의 조직에 자신의 암살을 의뢰한다는 설정쯤은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더 이상 철학 혹은 윤리학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은 매우 제한적이다. 이 설정 이후에 나오는 인물들간의 대화는 너무 장황하고 연극적이라 설정상 매력적이어야 할 암살자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스릴러 작가가 써도 크게 티안나는 부분에 공을 들이기 보다는 암살주식회사의 당위성에 대한 드라고밀로프와 윈터 홀의 토론이 좀더 자세히 그려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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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조두순 사건 때 사람들은 외국 사례까지 인용하며 범죄에 대한 사적인 보복을 이야기 했었다.
이정도 여론이면 사적인 보복이라기보다 공적인 보복에 가깝지 않을까...
현실에 청부업자들은 있어도 소위 '도덕적 살인'을 대행해주는 암살주식회사는 없으니, 범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만명쯤 모여 그 범인을 둘러싸고 한번씩 발로 걷어찬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태원 살인사건에서와 같이 둘중 하나가 범인임이 분명해도 그 하나를 특정할 증거가 없다고 무죄인데,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법원은 그 만명의 사람들에게 어떤 형을 내릴까? 사법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조직범죄 어쩌구 하면서 형 선고하면서 여론도 걱정되니 적당히 집행유예 하지 않을까? 다 합치면 집행유예 2만년쯤 되려나?

사실 판사에게 '네 자식이 당했다고 생각해봐라!'라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 판사의 역할이 가장 무자비한 보복의 대리인은 아니니까. 하지만 직업인의 평가로서 징역 12년이 작은 형은 아니겠지만,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지도 않은 범인에게 국민들의 감정은 그렇지 않다. 법이 보복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가상의 암살주식회사 같은 사기업(?)과 서비스 경쟁(?)을 하려면 좀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소설속 암살주식회사가 행한 암살의 대상들은 대게가 권력이 있고, 나쁜 짓을 했으나 정당한 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법이 가진자의 허물에는 잘 미치지 않는다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때문일까. 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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