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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tchat

법-1

by edino 2023. 3. 18.

회사에서 변호사와 같이 계약서를 검토한다거나 하는 일 외에, 법을 느낄 일은 나같은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법원/검찰청역'을 매일같이 지나다녀도, 거기서 내려 법원이나 검찰청에 갈 일은 얼마전까지 딱 한번 있었다.

 

대학원때 소위 랩비라고 하는, 연구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거나 기타 잡비 같은 용도의 돈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매달 한번씩 받아서 관리하는데, 어느 달엔가 수표와 현금이 섞인 랩비를 받아 봉투째 노트 사이에 끼워넣고 랩 미팅을 다녀오니 그 봉투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강의실보다 위층의 대학원생들과 교수만 주로 다니는 공간인데다 연구실 안에서 없어졌으니, 외부인이라기보다는 우리 랩이나 다른 랩의 대학원생 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딱히 의심이 갈만한 사람이 있던 건 아니었다. 랩 안을 다 뒤져보아도 안나왔으니 누가 가져간 건 맞을 것이다.

 

금액은 잘 생각 안나지만 백만원 좀 넘는 정도의 돈 아니었나 싶다. 석사 과정 때 그 1/10 정도를 월급이라고 용돈(물론 용돈으로도 부족하지만)처럼 받고 다니던 시절이라, 그냥 재수없다고 넘기기엔 좀 큰 돈이었다. (지금이라도 100만원 잃어버리면 어떻게든 찾으려 하겠지만) 연구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결국 뜻을 모은 방책은, 교수님에게 알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는 말고, 당시 랩비를 받는 날이 월급날이기도 했기에, 각자 받은 수표 일련번호를 모아 잃어버린 랩비의 수표번호를 유추해내는 것이었다. 다행히 랩비 수표 번호가 다른 수표들 사이의 번호이고 연속된 번호라고 추정할 수 있어서, 상당수의 수표번호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특정할 수 없었던 3장 정도의 수표와 현금 몇만원은 날린 셈이지만, 그걸 어떻게 처리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유추해낸 번호들을 가지고 분실신고를 했다. 분실신고를 어디다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실제로 돈으로 찾는 것은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아마도 은행들에 그 신고된 번호들이 공유될 것이고, 혹시라도 누군가 사용한다면 누가 진짜 주인인지 다툼이 있을 것이다. 서너달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다행히 그 번호들은 어디서도 사용이 되지 않아 신고한 내가 주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걸 확정받는데 내가 법원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법원에 갔던 기억은 꽤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일단 가정법원 앞이었는지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듯하게 상스럽게 입은 한 50대 정도 되는 부부가 법원 앞에서 서로 막말을 해대던 장면. -_-; 그리고 내 수표 관련 건을 판결(?)하는 법정에 들어갔다. 시간 맞춰 가 앉아 있으니 법관이 들어온다고 모두 일어나랜다. ???? 난 아무런 죄가 없는데 왜???? 그리고는 수많은 비슷한 사건번호(?)들과 함께 뭔가 판결인지 뭔지 내리고 순식간에 끝났다. 이런 요식행위 때문에 나를 여기까지 오라가라 했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권위를 인정하는데 인색한 나로서는 그날의 경험이 몹시 불편한 것이었다. 아무런 죄가 없이도 이럴진대, 내가 법이라도 어겨서 저 앞에 선다면 저들이 나를 신처럼 판결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정말 법원 갈 일은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다짐. 그리고 혹시라도 고시나 로스쿨을 했더라면 판사나 계약서만 보는 변호사라면 몰라도 재판 나가는 검사나 변호사는 못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나서 20년도 넘게 지났다.

말도 안되는 판타지이지만 법정 나오는 드라마도 보고, 검찰 출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제대로 된 재판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판을 한번 구경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니, 대부분의 재판을 보는 데에는 아무런 사전 준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어느 법정에서 어떤 재판을 하는지는 홈페이지 통해서 미리 알기 어려웠다.

 

집에서도 가깝겠다, 그 옛날의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평일 쉬는 날 하루 날을 잡아 법원에 갔다.

기자들과 방송 차량들이 꽤 있었는데, 아마 서해공무원피격사건 관련 전정권 인사들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여부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는 진실 근처에서 서성거리기는 커녕, 무엇이 진짜 논점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길고 복잡한 사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겉만 핥는 보도를 해대고, 무지성으로 양쪽 주장을 전한다. 대부분의 기사나 뉴스 기자 멘트는 인공지능까지도 필요 없이 그냥 RPA 정도면 될 것이다. 현대의 정치는 뉴스 꼭지에 맞는 분량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에 구호와 프레이밍이 난무하는 건 결국 언론 탓이니, 정치가 저질인 건 언론의 기여가 상당하다.

 

 

점심시간 즈음에 가서, 재판 제목과 시간/재판정 등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보고, 주변 식당에서 먼저 밥을 먹고 왔다. 처음에는 형사사건과 민사사건 둘다 보려했는데, 아무래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형사쪽이었다. 재판정에서 이뤄지는 일을 공개적으로 적는 것에 어떤 법적 제한이 있는지 몰라 세부적인 것은 적을 수 없고, 느꼈던 점들 위주로 남겨본다.

 

1) 첫번째 참관한 재판은 사실 법정에 판사들 들어올 때 권위적으로 다 일어서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 재판 시작하고 들어갈까도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리 잡고 앉아 있을 때 판사들이 들어왔다. 앉아서 개겨도 되나 했는데, 시대가 변한건지 그 판사들 느낌이 그랬는지 내가 변한건지, 별로 쓸데없는 권위가 느껴지지 않고 판사들이 다른 재판 참여자들과 서로 인사하는 느낌이라 크게 거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큰 법정은 아니었지만 방청석에 참관자가 나 하나였다. 피해자측이든 피고측이든 가족이나 친구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법정의 경위같은 두어명을 빼고는 모두가 여성이었다. 판사 3인, 검사측 2인, 구속상태의 피고와 피고 변호인까지 모두가 여성.

 

이 재판이 가장 인상깊었는데, 일단 시작부터 내 예상을 빗나갔다. 판사가 증인 출석 안했냐고 묻자, 검사가(그분 옷차림도 검사복 안으로 신은 금색 운동화같은 신발이 내 선입견을 벗어났다.) 아직 안왔다면서 재판정에서 잠시 나가서 증인쪽에 전화해보고 오더니, 증인이 자다가 이제 막 일어났다고 전한다. 드라마같은 분위기를 예상한 건 아니지만, '준엄한' 재판정의 분위기는 역시 대단한 판타지였다. (후술하겠지만 재판정의 준엄함은 다른데서 온다.) 판사와 검사는 증인이 1시간이면 올 수 있을 것인지, 오긴 올 것인지 등에 대해 매우 난감해하며 얘기하다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한다.

 

검사가 피고의 혐의를 얘기하고 변호사는 피고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현장에서 오간 얘기들만으로 사건의 전모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막장스러운 사건의 전개였다. 검사의 설명도 의아했는데, 변호사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이건 피고가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인 것을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피고는 사건 당시에 술로 인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였지만, 흔한 변명이라기보다는 도대체 사건의 실체가 뭐고 왜 저 피고가 여기에 앉아있는지 너무 궁금한 전개였다. 변호인이 국선변호사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피고는 지금 본인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저 피고는 가족이나 그 누구의 도움도 제대로 못받고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이 재판은 재판이라기보다는 특별히 갑을 관계가 없는 판사-검사-변호사라는 3개 회사의 회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검사는 고소가 들어왔는데 들어보니 죄가 있는 것 같아 기계적으로 기소하고, 변호사는 피고인을 돕고 싶어하는 느낌이 있긴 한데 피고인은 오히려 자신을 보호할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고, 판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실체적 진실을 알기엔 역부족인 것 같고. 진실이 밝혀지고 죄 있는 자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지는 현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워낙 독특하게 느껴지는 사건이라 차후 재판 일정이 잡히면 다시 와서 결말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2) 두번째 재판은 그나마 어쩌면 나나 내 주변 사람들도 여차하면 처할 수 있는 상황같았다. 연배도 나보다 위인, 멀쩡히 교육 받고 사회적 위치도 있는 직업의 피고가 술자리 동석한 지인과의 술김에 사소한 감정 싸움이 폭행 고소로까지 이어진 사건. 이 사건은 수많은 목격자(피고인편, 피해자편, 제3자 등)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진실을 완전히 밝히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폭행인지 무엇인지 어쨌든 피해가 대단한 건 아니라 구형도 집행유예 정도인 것 같은데, 피고는 유죄 자체가 본인에게 타격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재판부를 향해 반성과 호소문을 길게 읽어내려갔다. 이미 2,3년간 재판도 끌어온 것 같은데,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피해자보다는 재판에 시달리는 피고에게 훨씬 동정이 갔다.

 

피고 자리에 서야 한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로 보인다. 왠만하면 그럴 일 만들지 말고, 혹시라도 꼬투리 잡힐 일 있으면 (고소당한 경우라면) 제대로 된 사과로 여기까지 안와야겠지만, 그래도 오게 된다면 변호사비를 펑펑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물론 돈이 있다면)

내가 아무리 떳떳해도, 이 사무적인 공간에서 진실은 누가 밝혀주지도 않고, 밝혀지지도 않는다. 피곤한 공무원인 검사보다, 돈을 많이 받아 좀 더 신경써줄 변호사가 시간을 많이 내어주면 재판정은 기울어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미 여기까지 온 사람은 검사(판사 그리고 변호사)들의 산업에 호갱이 된 것이다. 돈은 휘청하게 들지만 대접은 꿈도 못꾼다. 재판을 보고 있으면 그게 아주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3) 세번째 재판은 들어가 앉아있으니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이 내 옆에 앉는다. 어떤 사람들인지 몰라 긴장되었으나, 나중에 보니 연관된 다른 사건의 피고에 대해 증언을 하러 나온 또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들이었다. 범죄도 강력범죄는 아니고 대포폰 같은 사건이라 긴장은 좀 풀어졌다. 시간이 꽤 지체되어 오래 보지는 못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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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없이도 살' 사람들(법 없으면 더 잘 살 사람들 말고)은 법원에 가서 재판 방청 해보는 걸 매우 추천한다. 당사자가 아닐때 가보면, 살면서 이 근처는 절대 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거다. 뉴스나 드라마속 재판 말고, 실제로 법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는 건 세상 돌아가는 걸 판단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혹시 재판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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