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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nerary/96 : Europe

수집의 끝 - 3

by edino 2009. 3. 19.
아직 수집의 끝 시리즈 두번째인 동전들의 처리 방법은 결정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또 한가지 사진만 찍어두고 치워버린 것들이 있다.


전의 각종 티켓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이 녀석들은 여행을 다니면서 모은 것들이다.
지도, 기차 시간표, 미술관 팜플렛, 전철 티켓, 무료 엽서, 각종 입장권 등...
이중 대부분은 내 첫 해외여행인 96년 배낭여행때 모아온 것들이다. 모을 때는 나름 나중에 기념이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절대 다시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기념으로 뭔가 가져오는 것이 점점 적어졌다.
뭐 그 흔한 제주도도 처음 가본게 2006년이니 나도 은근히 촌놈이다. 하긴 비행기표도 계속 모으다가 작년부터 그냥 버리기 시작했다.

유로화가 없던 시절이라 이때 유럽여행은 환전이 참 번거로왔다.
비상용으로 부모님 카드를 가져가긴 했지만, 가져간 달러와 여행자수표로 거의 모든 것을 해결했었다. (생각해보면 어느 도시에서인가 저렴한 숙소를 구하지 못해 초과지출을 하게 되었을 때 카드를 사용해본 게 생애 최초의 카드질이었다.)
어쨌든 체력 좋던 시절, 보고 싶은 것도 넘치던 시절, 툭하면 국경을 넘으면서 매번 환전을 하고, 최대한 수수료 아끼기 위해 예산을 관리하다 보니 많이 아껴쓰기도 했고, 신경도 많이 쓰이기도 했다. (식빵으로 몇끼 때우면서 우리나라에서 못구하던 CD를 10장 지르기도 했지만.)


환전과 단위에 익숙해지는 일이 큰 일 중 하나라서, 이렇게 당시 환율표를 신문에서 오려서 가지고 다녔었다.
미국 달러 기준환율이 810원... 100엔이 734원... 참 감동적인 환율표가 아닐 수 없다.
다른 건 다 10년 이상 뒤로 돌리면서, 환율은 어케 요때로 안되나?


버리기 전에 그래도 한번쯤은 보고 버리려고 이것저것 펼쳐봤다.
스위스에서 돌아다닐 때 보던 지도들과, 묵었던 유스호스텔 방/침대 번호가 적힌 것, 100m에서 뛰어내렸다는 번지점프 증명서 비스무레한 것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번지점프는 당시 원화로 8만원쯤 해서 몇끼를 헝그리하게 해결해야 했고, 이미 그당시 몸무게는 여행전보다 8Kg, 지금보다 17Kg 적게 나갔었다. -_-;


유레일 패스로 기차 탄 것들도 기록해 뒀는데, 다시는 못 올 곳처럼 정말 미친듯이 돌아다녔더라.
때늦은 후회지만, 학생때 빚을 내서 좀 더 다녔어야 했다.
(물론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빚을 내서 구글 주식을 사겠지만.)
시간과 돈과 체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인생의 시기는 거의 없다.
그중에 가장 꾸기도 갚기도 쉬운 것은 돈 뿐이다.
나는 나중에 Kiwi가 여행을 가겠다고 하면 기꺼이 여행비용을 '꿔주고' 독려할 예정이다.

좀 배아픈 얘긴데, 론리 플래닛 창업자 부부가 쓴 론리 플래닛 스토리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지만 내가 과연 직장이라는 것을 원했던가? 모린과 나의 꿈이 과연 '아홉 시 출근, 다섯 시 퇴근' 인생일까? 런던에서 사는 것은 좋았지만, 교외에 살면서 매일같이 일터로 출퇴근하는 생활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눌수록 그런 판에 박힌 삶은 우리와 더욱 멀게 느껴졌다. 마침내 우리는 진로 문제를 잠시 미뤄 두고, 1년간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러니까 현재의 삶에서 잠시 벗어나 여행을 즐긴 다음 정착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포드사에 편지를 보내 일자리 제안은 기쁘지만, 1년 후에 일을 시작하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 고맙게도 회사에서는 나를 위해 1년 동안 자리를 비워 두겠다고 답장을 해왔다. 나는 지금도 그 답장을 보관하고 있다.

하아... 포드사도 대단하고, 이 인간도 어지간히 능력 있었나보다.
이런 회사라니, 정말 충성하고 싶을 듯.
뭐... 이 인간은 비워둔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포드는 지금은 망해가고 있긴 하지만.
(뭐지 이 삐딱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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