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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nerary/96 : Europe

Mont Saint Michel

by edino 2009. 9. 7.
96년의 배낭여행 때 마지막 행선지인 프랑스에서도 가고 싶었던 곳은 많았지만, 역시 시간에 쫓겨 들른 곳은 많지 않다.
지금은 굳이 와인 때문이 아니라도 보르도나 보르고뉴쪽으로 쭉 다니는 것이 무척 끌리지만, 그때 가보고 싶었던 곳은 몽 생 미셸을 비롯한 노르망디 지방, 샤모니, 아를, 오를레앙, 샤르트르, 마르세유, 아비뇽 등이었다. 그때는 미친 체력이라 항상 무리하며 다녔지만, 여남은 5일 남짓한 시간중에 빠리를 포함해서 더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고, 그중에 선택한 곳은 샤모니와 몽 생 미셸이다.

몽 생 미셸은 길 하나로 육지와 이어진 섬같은 곳이었지만, 모래가 점차 쌓여 거의 육지와 붙어있는 것 같이 되어간다고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어쨌든 없는 시간 와중에도 다른 곳을 포기하고 1박 코스로 잡고 온 것은 결과적으로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오기 전 이곳에 대한 기대라면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 시리즈 중 '기암성'이나 뒤마의 '철가면' 같은 소설의 배경 느낌을 기대하게 하는데, 검색을 해보니 실제로 이곳이 '철가면'의 배경인 모양이다. '기암성'과 이곳을 연관지어 상상한 건 나뿐은 아닌듯 검색해보면 몇몇 사람들이 그 소설의 배경같다는 얘길 하는데, 재미있게도 '기암성'이라는 제목은 약간 오역에 가까운 번역인 듯하다. 실제 '기암성'의 배경은 이곳과 멀지 않은 마찬가지로 노르망디 해변의 유명한 바위란다.

어쨌든 낮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첫 느낌은 뭐 낮에도 '볼만한' 정도이긴 했지만, 사실은 실망쪽에 더 가까웠댈까.
이곳에 온 건 월요일이었는데도 관광 인파와 차량은 엄청났다. 안을 들어가봐도 뭔가 비밀스러운 기분이나 약간은 오싹한 기분 따위를 느끼기엔 너무 붐볐다. 그래도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고, 검은 새들이 수도원 주변에 모여 있어 마녀의 성 같은 분위기도 풍겼다.

그래도 밤에 야경만큼은 보고 싶었다. 그리고 했던 고민은 바깥에서 밤을 샐 것인가, 숙소를 잡을 것인가 하는 것. 일행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노숙으로 결정할 것이었으나, 혼자서는 너무 춥고 긴 밤이 되지 않을까 싶어 고민을 하던 때에, 하늘에서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고민을 바로 접고 숙소를 구했는데, 이 제방을 따라 나와서 거의 마을 입구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당시의 환상적인 환율 탓도 있겠지만 4만원 정도 하던 방을 구하고선도 유스호스텔 2박 값이라고 아까워하던 기억이 난다. 한달쯤 다니면서 온전한 호텔방을 써본 건 두어번 정도 뿐이라, 가격으로 보건데 결코 좋은 방이 아니었을텐데도 무척 호사스런 기분을 느끼던 기억이 난다. 방에 TV도 있어서 밤에 영화 High Lander를 보던 기억도 아련히 나고.

어쨌든 그날의 만조 시간은 밤 11시였고, 방에서 빨래도 하고 약간의 휴식도 취하다 그때쯤 다시 나왔다.
비는 그쳤고, 어두운 제방 끝에 우뚝 솟아있는 몽 생 미셸의 자태는 감동 그 자체였다.
2km 조금 못되는 제방을 걸어 다시 수도원으로 향했다.


삼각대도 없이 몇 장 안남은 필름으로 겨우 찍은 사진이다.
제방길은 한없이 적막했으나 늦은 밤에도 이 안은 약간 시끌벅적했고, 밤 12시쯤 되어서야 파장 분위기.
배고픈 여행자 살림에 남은 10프랑으로 배를 채울까 고민도 했으나, 이 밤을 맥주 한 캔 없이는 안되겠기에, 하이네켄 한 캔을 샀더니, 한잔 하고 기분좋게 취한 주인 양반이 그 두어 배 값은 될 것 같은 바게뜨 샌드위치 하나를 그냥 턱 안겨준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배도 채우고, 딱 한대 남은 담배와 딱 한 캔 뿐인 맥주와 함께 인적 드문 제방길에서 몽 생 미셸을 한참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는 몽 생 미셸은 한없이 고요한 가운데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구의 자전 소리라도 들릴 듯한 적막함이었다.
나중에는 사람도 없겠다 혼자서 목청껏 노래도 부르면서 그 제방길을 걸었다.
한참을 보다 돌아오는 길에도 자꾸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보석같은 빛.
어느덧 구름은 걷히고 별들이 쏟아지고, 커다란 유성마저 지나가고...

여행의 막바지에 선물같던 이날 밤은 혼자였음에도 내 일생에 가장 로맨틱한 밤 중 하나였다.



(P.S.) 이 글을 쓰고 있는 밤은 과식한 키위가 잠못자고 보채는 통에 두시간 가까이 부부가 고생한 괴로운 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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