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권이 자본주의에 백기투항한지 겨우 5년여 지났을 무렵, 유서깊은 이 도시를 반세기 가까이 지배해온 사회주의의 흔적은 이미 너무나 희미한 것이었다. 당시 가장 확연했던 사회주의의 흔적이라면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인) 가난함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비해서도 매우 싸다고 느껴질만한 물가 수준과 비교적 서유럽에서 가까운 거리. 이 도시는 가장 인기있는 동유럽 관광지 중에 하나였다.
당시에 나는 처음으로 우리보다 못사는(평균 소득이 낮은) 나라에 발을 디딘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우리보다 평균소득이 현저히 낮은 나라를 방문한 경험은 모로코와 중국 정도 뿐이다.)
우리보다 한참 잘 사는 다른 서유럽, 북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이곳은, 그래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안겨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시끌벅적한 이 시계탑 근처 광장에서 즐기는 것은 관광객들 뿐이고, 현지인들은 이런저런 물건들을 파는 신세.
혼자서 뻘쭘하게 손님들을 끌지 못하던 저 여성의 표정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관광지 효과'를 일으키는 무리의 일원이 된 불편한 마음.
이런 불편한 마음을 피하려면 우리보다 더 잘사는 동네에 가거나, 관광객쯤 별로 티도 안나는 대도시거나, 아님 별로 여행객들이 많지 않아서 오히려 여행객이 현지인들의 구경거리가 될만한 동네를 가거나.. 그렇지만 여행자의 이기심에 꼭 그런 곳만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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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다소 무겁던 마음은 저녁이 되면서 들뜸으로 바뀌었다.
여행자들로 점령되었을지라도 광장의 분위기는 젊은 그 자체였다. (뭐 나도 그땐 확실히 젊었다. ㅋㅋ)
여기저기 널부러진 여행자들, 곳곳에서 기타를 쳐대며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
눈앞의 야경 또한 너무나 훌륭하고, 대충 다 친구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
관광객들로 채워진 광장을 보는 일은 흔하지만, 이렇게 젊은 분위기가 지배하는 광장은 아직까지도 보지 못했다.
분위기에 취해 돌아다니다보니 별로 치안이 좋은 평은 아니었던 이 도시에서 꽤 늦어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숙소를 찾아 가는 길에도 발길을 잡아 끄는 것은 얼마나 많던지.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자 울려퍼지는 여인의 노래 소리.
한 여성이 돌탁자 같은 것에 기대어 앉아 악보 같은 것을 손에 접어 두손으로 들고 우아한 모습으로 노래를 하고 있다.
멋진 소프라노 목소리와 오래된 건물의 벽들이 너무나 훌륭한 울림을 들려주어서 발걸음을 한참 멈출 수 밖에 없던 풍경.
이때 했던 생각이 서울 돌아가면 바이올리니스트 친구가 거리에서 연주 한번 하는 걸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ㅋㅋ
언제였던지 아무튼 이 생각은 언젠가 실제로 감행을 했다.
내가 어찌 꼬셨는진 몰겠지만 암튼 강남역 국기원 도서관 근처 공터에서 친구가 연주를 했다.
지나가는 이 중에도 귀밝은 이가 있어, 연주가 끝나자 그녀의 이름을 물으며, 혹시 나중에 유명해지면 나중에 이 감상 기회를 영광으로 알겠다던가 뭐 그런 취지의 얘길 했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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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이때처럼 많은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려 본적도 없는데, 어쨌든 이날 밤엔 싼 물가의 덕을 톡톡히 봤다.
같은 숙소에 묵은 한중일 3개국 사람들이 어쩌다 보니 지하 Bar에서 합석해서 마셨는데, 맥주 500cc정도 한잔에 300원 꼴이었다. 일행들에게 한잔씩 다돌려! 외쳐봐야 3천원. 돈 아껴가며 여행하느라 먹는 것도 제대로 못먹던 젊은 여행자들에게 얼마나 신나는 날이었겠나. 새벽2시 영업시간 끝났다는 바텐더의 짜증도 무시해가며 부어라 마셔라 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곳의 물가는 그때만큼 싸게 느껴질 것 같진 않다.
훌륭한 야경은 그대로겠지만, 그 광장은 여전히 젊을까?
그렇다 해도 나는 이제 그 무리에 섞이기는 어색할 것이고.
다시 한번 가본다면 어떤 느낌일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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