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원로'라 해도 될 법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마 우리 세대에게는 소설계의 서태지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워낙 하루키 하루키 해서 상실의 시대 같은 소설이 유행하던 무렵에는 그 기세에 질려 하루키 근처에는 얼씬도 안했었다.
이제는 유행이라기엔 너무 길다.
'국민 일본 소설가'(?)쯤 되는 자리를 차지한 그이기에, 이젠 뭐 별로 질려할 것도, 확 끌릴 것도 없다.
그 간 그의 단편집 한두권은 읽어본 듯. 대충 스타일은 알고 있다.
긴 교육을 다녀와서 좀 말랑말랑한 게 필요하던 차에 회사 Library 신간을 훑어보다 신청했는데 꽤 빠른 신청이었나보다.
줄이 길 것 같은데 바로 차례가 돌아와 단숨에 읽었다.
무슨 20대 여성 잡지에 연재중인 글 묶음인 듯.
젊을적엔 왠지 후까시의 대명사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젠 귀여운 척(?)도 스스럼없이 하는 쫌 젊은 할아버지에 가깝다.
아는 지인 몇몇의 글투가 이 글들과 비슷한 느낌인데, 그들도 하루키 키드였던걸까.
암튼 뭐 적당히 심심풀이로 읽을 만한 글들이다.
그중에 나랑 닮은 구석이 있어서 재미있었던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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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행을 떠나자
여행 준비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되도록 짐을 줄이는 것이다. 여행중에 물건은 자연스럽게 늘어나니 그걸 생각해서 짐을 적게 싸야 한다. 그러나 입을 것이 부족하면 걱정이라는 사람이 많아 "결국 팔 한 번 껴보지 않았네"라고 할 옷을 몇 벌이나 끌어안고 여행을 마치기도 한다.
나는 평소 해외여행 시에 갖고 갈 옷을 미리 준비힌다. 여행 도중에 버릴 수 있는 옷 말이다. 티셔츠나 양말이나 속옷은 '이건 이제 필요 없겠네' 싶은 것들을 모아서 챙겨 간다. 그리고 입고 버린다. 빨래하는 수고도 덜고 짐도 줄이고 일거 양득이다.
다만 여성의 경우 신혼여행 같은 데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귀찮아서 이제 버릴 때가 된 속옷만 갖고 왔어. 무라카미 씨도 그랬다잖아." 이런 사태라면 남편이 경악할지도 모른다. 무라카미라니, 뭐하는 놈이야, 이렇게 될는지도. 그 점은 상식선에서 잘 판단해 케이스바이케이스로 해주세요. 되도록 무라카미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이렇게 쓰면 여행에 아주 익숙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도 약점은 있다. 그것은 레코드다. 외국에 가면 반드시 중고 레코드점에 들르는데, 진기한 것이 있으면 스무 장, 서른 장씩도 사버린다.
....그건 어찌 됐건, 여행지에서 매일같이 낡은 옷을 버리고 갈 때의 기분이란 상당히 상쾌하다. 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 대단한 무게도 아니지만 나라는 인간이 그때마다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괜찮다면 한번 시도해 보시죠. 그런데 거꾸로 말하면 여행지가 아니면 좀처럼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여행이 주는 효용이겠죠.
이건 나랑 똑같아서 재밌던 글이다.
옷이 상당히 낡았는데 기왕 빨래가 되어 있고, 한번쯤 더 입어도 될 듯한 상태의 옷들은 일단 여행용 트렁크에 처박아둔다.
다행히 나는 남성의 경우라서, 신혼여행 때에도 이를 실천했다.
신혼여행 사진속 옷들 종 몇벌은 이제 내게 없는 옷들이다. ㅋㅋ
이번 독일 다녀올 때는 특히 유용했다. 가방 크기에 비해 일정이 길고, 사서 들고올 것이 많았다.
독일에 버려진 것들은 청바지 한벌, 면바지 한벌, 반바지 하나, 티셔츠 하나, 양말 한켤레.
이 정도면 여행에서 버린 중 최고 기록! ㅋㅋ
이제는 음원을 digital로만 모으니 해당사항이 없지만, 첫 유럽여행 때는 밥도 굶어가면서 중고 CD 10여장을 사서 배낭에 잔뜩 싸짊어온 적도 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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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는 편입니까?
.....다만 그렇게 비교적 과묵한 내 인생에도 예외였던 시기가 있다. 스물넷에서 서른둘까지의 칠년 반, 가게를 해서 밥을 먹고 살았다. 취업이 끌리지 않아 빚을 내어 가게를 열었다.... 그 시절에는 나답지 않게 정말 상냥했구나 싶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감탄스럽다.
그런데 당시의 지인을 오랜만에 만나면 "하루키 씨는 옛날부터 정말로 무뚝뚝했다니까. 거의 말이 없었지"라는 말을 적잖이 듣는다. 그렇게 말하면 나로서는 참 화가 난다. 어이어이, 내가 그렇게 고생해서 상냥하게 대했는데 어째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싶다.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노력 같은 것 하지 않고 천성대로 했더라면 좋았을걸.
그런데 그 시기에 나름대로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한' 감촉은 지금도 내 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당시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잘 지탱해주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일종의 사회훈련 같은 것이다. 인생에는 분명 그렇게 평소와는 다른 근육을 열심히 사용해볼 시기가 필요하다. 설령 당시는 노력의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말없는 분들, 힘내서 잘 사세요. 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마 말없이 응원하겠습니다.
나도 말이 너무 없고 조용하단 말을 징하게 많이 들어왔다.
특히 사회생활 하고 부터는 뭔가 피드백을 받을 일만 있으면 태반이 그 얘기다.
(비교적 한정된 인원들끼리 같이 지냈던 벤쳐 재직시절은 약간 예외이려나?)
나에게는 지금이 하루키의 가게 시절인가 싶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는 때다.
그래봤자 피드백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ㅎㅎ
위의 하루키 글과 비슷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대학교 1학년때 무려 17:17 미팅 자리.
10분 정도씩이나 될까, 자리를 쉬프트해가며 상대와 얘기를 나누는 시간.
그중 한 상대와 나는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상대가 마음에 들었었는지 꽤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래서 속으로 '흠, 이거 나를 너무 수다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edino씨는 원래 그렇게 말씀이 없으세요?"
정말로 나는 멘붕에 빠져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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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재미있던 얘기는 '바위에 스며들다'라는 글인데, 그 글에 따르면 원래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와 매미'였다고 한다.
이솝이 살던 그리스에는 매미가 있었지만, 북유럽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해 베짱이로 바뀌었다나.
심지어 일본 드라마든 애니메이션이든 여름 풍경 묘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매미소리는 북쪽 나라 국가들로 수출할 때는 소리를 삭제하여 수출한다고. TV 고장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대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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