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패배의 멘붕에서 이제는 많이 벗어나왔다.
처음부터 문재인 후보에게 관심이 있던 건 아니다.
어쨌든 나의 표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릴 야권통합 후보에게 갈 것이었기 때문에, 후보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굳이 큰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안철수씨는 출마를 선언할 것이고, 그래도 문재인씨가 통합후보가 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민주당내에서도 적수는 없어보였고, 안철수씨와는 둘의 성향상 반드시 단일화를 할 것이었으며, 단일화 롤을 정하는 것이 단일후보를 결정하는 것인 상황에서, 당내 경선을 거쳐 올라온 후보가 혈혈단신 출마를 선언한 후보에게 일방적 양보를 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문재인씨의 승리도 그 이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항상 불리하게 나왔더라도, 출구조사 결과가 거꾸로 나왔어도, 나는 문재인씨가 되는 것이 순리이고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거없는 단순한 믿음은 아니었다.
패배였다고 할만한 지난 총선에서도 전체 야권의 득표수는 여당보다 많았고, 대통령 선거 참여율은 총선보다 훨씬 높으니 비여당 후보가 유리할 것이었다. (실제로 모 방송사는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금지된 이후의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개표방송 리허설을 문재인씨 당선으로 가정하고 진행하였다고 들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문재인은 민주당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였고, 박근혜는 최악의 패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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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가 충격적이었던 것은 단지 패배해서 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가정했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는 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대 이상의 투표율에도 패배하였고, 총선에서 절망감을 안겨줬던 강원도와 충청도, 특히 충청도의 박근혜 지지는 예상을 넘어섰다. 공약 똑같이 내기라는 영리한 전법도 위력적이었으나, 이정희의 토론은 반대쪽에 더 힘을 실어준 것 같았고, 3차 토론에서 보여준 적나라한 무능함에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관대했다.
미워하는 사람이 적은 쪽이 당선되는 게임에서, 박정희를 겪은 세대는 박정희보다 노무현을 더 미워했다.
박근혜 후보는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등떠밀린 것이긴 하여도 일찌감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을 매듭짓고자 하였고, 그 아버지 지지자들이라는 유산은 상속하였으되, 빚은 연좌제라는 논리로 상속하지 않았다. 또한 총선에서도 그러했듯이 MB정부와는 다른 당이었던 양 행동하여 실정에 대한 비판도 피해갔다.
반면 문재인 후보는 우직하리만치 참여정부의 부채를 모두 껴안았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정책은 참여정부보다 더 진보적으로 느껴졌다. (여당의 공약 카피에 대응하고자 더 나가고 더 선명히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별로 현명한 대응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50,60대의 선택은 기득권의 선택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박정희 딸 신드롬이 단지 자신들의 젊었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크지 않았나 생각도 해봤었는데, 물론 그런 단순무식 표도 적진 않겠으나, 자신의 이익을 더 대변해줄 것 같다는 냉정한 판단에 의한 표심도 상당했으리라.
하지만 지역과 연령대(계층과 성별까지)에 따라 극명히 갈린 표심은 여러 변수를 한꺼번에 놓고 분석해보면 결과는 좀더 복잡할 것이다. 박근혜를 선택한 가장 중요한 선택 사유들에 대해, 그리고 그 사유들이 각각 차지하는 비율에 대해서 철저히 분석하지 않으면 다음 선거도 어려울 것이다. 보수당이라서, 경상도당이라서, 박정희 딸이라서, 노무현이 싫어서, 민주당이 싫어서, 빨갱이가 싫어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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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교수의 말대로,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예단하고 저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당선 자체가 친일과 쿠데타, 장기독재에 면죄부를 주는 역사의 퇴보일지언정, 박근혜 정권이 잘하고 못하고는 역사를 제대로 돌려 놓는 데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아무리 잘하든 못하든, 그녀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평가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되었으면 더 심했을 것이라고 자기확신을 강화할 것이다.
물론 엄청나게 잘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일말의 기대를 해본다면, MB정권보다 덜 썩고, 덜 못할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우선 그녀가 내세웠듯 그녀는 직계가족도 없고 MB같은 탐욕을 가진 인물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박정희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박정희의 장점(대게는 신화에 가까운)만을 기억하고 그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더더군다나 그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잘하려고 애쓸 것이다.
내가 MB 당선 뒤에 잠시나마 가졌던 착각은 '그래도 저들도 나름의 생각대로 나라를 위하려니' 하는 것이었다. MB정권에서는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MB보다는 훨씬 더 자기 내름대로의 생각대로는 나라를 위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선거 초기에 보여줬듯이 그녀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신의 편일지라도 내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부하의 손에 죽고, 그녀 또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맛본 수많은 배신감 탓이 크지 않을까 생각은 든다. 그러면서도 입지를 구축했다는 것은 그래도 아버지의 유산이 가장 크다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 능력에 큰 물음표가 따라붙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선거 이외에 그녀가 잘하는 그 어떤 것도 본 적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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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정말 대단한 낙관이고 김치국인지는 모르겠으나, 박근혜 당선인이 정말 '나라를 위해' 잘하고자 한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물론 많다. 특히 그녀의 지지층을 힘들게 할 수도 있는 일들을 그녀는 해야만 한다. 급격한 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는 한국을 연착륙 시키기 위해서는 고령층의 고통분담이 없을 수 없다. 또한 대북관계를 개선하지 않고서 한국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그 밖에도 그녀가 하면 덜 욕먹을 일들이 많다. 많이 겹쳤던 공약들을 우선적으로 해준다면 그것이 국민통합일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아버지의 신화에만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소통과 리더쉽은 검증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나라를 위한다는 그 마음만이라도 진실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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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말해서, 정치적으로 최악이었던 지난 5년간,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행복했다고 아니할 수 없으니까, 어쨌든 살아낼 앞으로의 5년이라고 못행복할쏘냐! 라는 심정이다. 물론 위정자들이 잘했더라면 정신적으로도 훨씬 스트레스도 덜했겠지만.
대학때 읽은 무라카미 류의 '69'는, 기대와 달리(?) 꽤나 장난스러웠는데, 뭐 이런 게 다있나 싶었지만 마지막 코멘트가 내 삶의 자세에 꽤 부합하여 좋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이다....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 소리를 들려 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결코 죽을 떄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씨가 후보가 된 후 여러 글들이나 지지연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된 인간 문재인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중에 누가 썼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문재인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자신에게 엄격한 길을 걸었으면서도 본인과 가족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흔치 않은 케이스라고. 이제 우리도 스스로 행복한 대통령을 가져야 국민들도 행복하지 않겠냐고.
문재인씨가 낙선하고 더이상 불출마를 선언하였을 때, 한가지 작은 위안이 된 것은 그가 그 행복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그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 때문에 아마 만신창이가 되도록 물어뜯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좀더 나은 때가 온다면, 그때 이런 품격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두어도 좋을 것 같은 욕심까지 버리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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