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간, 그러니까 4/2~4/4는 중국의 청명절 휴일이었다.
올해도 중국 휴일에 맞춰 쉬는데, 이번엔 가족끼리 휴가를 맞춰 어딜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Kiwi는 지난달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고, 하여 나에게 일종의 짧은 방학이 주어진 셈. 지난주엔 또 6일씩이나 출장을 다녀와서 놀 계획도 제대로 못세웠는데, 화요일에만 회사에서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끼리 평일 골프 약속이 잡혀있었다.
짧은 방학이 시작되는 월요일엔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연습한지 너무 오래되어 다음날을 대비하여 골프연습장에 우선 갔다. 이렇게 가끔 남들 일하는 평일에 여유를 만끽할 생각으로 어딜 다니다 보면 생각보다 팔자좋은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전에 잠원동 살 때 다니던 연습장인데 70분에 3만원이라 해서 '헉'했다. 이렇게 많이 오르다니,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때보다 더 많다. 것도 아줌마들만 있는 게 아니라 남녀노소 골고루다. 주변에 비싼 아파트 단지가 생긴 영향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연습을 끝낸 다음 혼자 하기로 한 것은 영화 관람. 혼자는 말할 것도 없고, Kiwi가 태어난 이후로 영화관에 가는 것이 아주 드문 일이다 보니 올해는 당연히 처음인 극장. 그다지 끌리는 영화들이 많은 시즌은 아닌데, 요즘 들어 이 영화로 사람들이 꽤나 시끄럽다. 전에 얼핏 TV에서 소개를 보고 한번 보고 싶단 생각은 했었는데, 어쨌든 이 영화를 보면 할말은 있겠다 싶어서 건축학개론으로 결정.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카피는 사실 (500) Days of Summer의 한국어 포스터에 씌여 있던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다"는 카피의 모방이면서도 한 수 아래다. 점수를 준대도 (500) Days of Summer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사랑 영화는 Punch-Drunk Love,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500 Days of Summer 정도가 생각난다.)
그리고 듣기로 우리 세대를 겨냥하고 있다니 그에 대한 반감 또한 없지 않았다. 영화 '써니'처럼 복고 코드가 노골적인 건 질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타겟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의 세대를 가리키고 있어서, 자꾸 생각나게 하고, 지금도 맥주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한캔 땄다.) 얼추 X세대라 불리던 내 위아래 나이대들도 이 영화를 자신 세대의 얘기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미안하지만 아니거든? 얘네 94학번이거든? ㅋㅋㅋ 완전 유치하다.
사실 별로 마뜩한 호칭은 아니었던 'X세대'의 아이콘이 될만한 노래 한곡을 뽑으라면 그렇다, '기억의 습작'이 될 수 밖에 없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내적 변화를 일으켰던 시기라면 1987년과 1994년이고, 그 시대를 대표할 노래라면 딱 그 해에 나온 '사랑하기에'와 '기억의 습작'이라고 본다. 1987년에는 유재하나 이문세도 있지만, 그래도 한 곡이라면 역시 '사랑하기에'다. '기억의 습작'의 경우에는 별로 경쟁작도 없다.
다들 새삼스러워 하듯이, 나도 참으로 새삼스럽다. 1994년에는 당시에도 1987년이 그렇게나 오랜 옛 일 같았는데 겨우 7년이란 세월이 그 사이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지금과 1994년의 사이에는 그다지 큰 간극이 없는 것 같은데도 20년이 코앞이다. 1994년과 현재의 사이에는 이미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하나의 히트 상품이 될만큼- 단절된 시간대가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새삼스럽다.(두캔째 땄다. 필스너우르켈의 색깔과 거품은 정말 예쁘구나.)
심지어 찾아보니 여주인공 배수지는 1994년'생'이다. ㅠㅠ 특별히 칭찬받을 만한 연기인줄은 잘 모르겠으나, 적당히 촌스러우면서 되바라져 보이는게 현실감 있어 괜찮았다. 다 한번 나이들을 까봤는데, 남자주인공 이제훈은 84년생. 요즘 잘 나가는 남자 배우들은 외모에 좀 비슷한 느낌들이 있는데 어쨌든 이 친구도 꽤 잘 나갈 듯. 한가인은 의외로 어려서 82년생이랜다. 배역 자체는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보는데 연기가 좀 욕먹는 듯? 난 뭐 그냥저냥 봤다. 다만 누구나의 첫사랑 치곤 좀 지나치게 예뻐서 튄다. 엄태웅은 74년생이라는데 피부 나이는 좀 더 되어 보인다. 훨씬 네임밸류 있는 배우들이 연기함에도 진짜 주인공들은 94년의 그들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현재 우리의 지갑을 열어 과거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참고로 이용주 감독은 1970년생이라는군.
생각할수록 영화가 참 영리하게 구매층을 잡았는데, 뭐 공대생과 음대생 커플이란 것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ㅋㅋ
그래서 영화가 영리하단 사실을 가정으로 두고 역으로 생각해보면, 아주 많은 남성들이 자신을 이제훈처럼 순수했던-찌질하단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남자로 생각하고 있나보다. 그리고 첫사랑은 배수지 정도로 예뻤고, 아마 지금쯤 한가인처럼 세련되고 더 예뻐져 있으리라 생각하나보다. ㅋㅋㅋ
근데 정말 다들 그랬을까? 사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욕망하기만 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집착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와 지겨워져 헤어졌을 것이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그저 데리고 놀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또다른 누군가가 더 좋아져 헤어졌을 것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와 아무런 극적인 일 없이 결혼까지 했을 것이고.
이제 곧 20년이니 기억이 왜곡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지만, 다들 정말 잊어버린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졌던 한조각의 순수함, 혹은 순진함들을 이 인물들을 통해 돌아보는 것이겠지. 서투름이라고 해도 괜찮을 그 순수 혹은 순진함들. 지금도 그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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