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숙제'에 이어 두번째로 읽은 다니엘 페낙의 소설이다.
말로센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시리즈중 일곱번째 작품인데,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2001년까지는 연작의 가장 최신작이었으나, 이후에 또 말로센 시리즈가 계속되었는지는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닥 인기가 많지 않은지 네편 정도만 번역이 되었고 그나마도 절판에 이후로 번역된 건 없는 듯.
다른 시리즈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이 책을 읽는데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없으나, 이전의 시리즈들을 통해 등장인물들을 더 잘 알았더라면 더 재미있는 부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뱅자맹 말로센은 어찌하여 직감적으로 자신이 매제의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가리라고 생각하고 책들을 잔뜩 구입하였는지 같은 것. 책 뒤에 옮긴이 김운비씨의 해설에 시리즈의 다른 편들에 대한 것들까지 꽤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추리소설 형식이라고 생각을 못했었는데 이 시리즈 전체가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 죽고, 그런데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여느 추리소설의 주인공처럼 사건의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나, 형사나 탐정처럼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면서 항상 엉뚱한 '희생양'이다. 해결사도 아닌 '희생양'이 주인공인 추리소설이라니. 그러니 애초에 이 소설은 쟝르문학으로서만 놓고 보자면 실격이다. 물론 프랑스에서만 매편당 100만부씩은 나간다는 이런 연작을 쓸 수 있다는 건 뭔가 있다는 거겠지.
이 소설에선 아무나 마구 죽어나가고, 성적으로는 더 막가는 얘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옴에도 불구하고 따스하고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다. 우선 책의 제목 '정열의 열매들'이 어디서 온 말인지만 살펴봐도 그렇다. 주인공 뱅자맹 말로센의 아내 쥘리가 잘못 낙태시킨 태아를 성질 별난 천재 외과의사 베르톨드가 수녀 제르베즈의 자궁에 이식해서 낳는데, 이 제르베즈가 운영하는 탁아소의 이름이 '정열의 열매들'이다. 말로센 가족의 아기들 외에는 주로 창녀의 자식들을 맡아 길러주는 탁아소, '정열의 열매들'.
이 시리즈는 매 편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반면, 매 편마다 아이들도 태어나는데, 이번 편 사건에서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 또한 매우 쇼킹하다. 너무 심한 스포일러라 여기다 적기는 뭣하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추리소설 형식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이런 느낌일 듯.
이야기뿐 아니라 문체 또한 매우 맛깔스럽고 재미있게 수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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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타 죽은 줄 알았던 누이 테레즈가 자신의 방에 잠들어 있는 것이 발견된 직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발작하듯 경련을 일으키며 누워 있는 누이를 가족 모두가 유령 보듯 쳐다보고 있던 때)
이어 우리는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집 안을 뒤흔드는 낮고 둔탁한 소리. 그것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망치 유령은 테레즈의 리듬에 맞춰 맹렬해졌다. 테레즈는 더욱더 요동을 치면서도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마룻바닥 치는 소리, 침대 스프링의 삐걱거림, 헉헉대며 그르렁거리는 신음들, 그리고 그 낯익은 냄새......
드디어 나는 알아챘다.
나는 몸을 쭈그려 앉았다.
침대 밑을 살폈다.
"됐어, 그만, 쥘리우스, 거기서 나와!"
개 쥘리우스는 곧 긁어대기를 멈췄다. 그리고는 제 덩치가 허락하는 한 민첩하게 몸을 빼내었다. 그놈 역시 우리가 부활한 인종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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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갇힌 누이 테레즈를 빼내오려고 동분서주하다 그녀가 집에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집으로 달려가 그녀를 마주친 때)
"안녕, 오빠. 잘 지냈어? 나 때문에 속끓이지 말라고 오빠한테 말했잖아..."
허구한 날 똑같은 이야기. 아이가 가출하고, 시꺼멓게 피가 마를 지경인 부모는 아이가 버스에 납작하게 깔리는 상상 아니면 극악무도하게 강간을 당해 조각조각 쓰레기 봉투에 나뉘어 담기는 상상을 하게 되고, 삶은 이제 다만 죽음의 맛일 뿐인데 그때 짠! 하고 아이가 다시 나타난다. 그러면 뭐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가 더이상 다른 곳으로 죽으러 가지 않도록 골백번 키스를 퍼붓기는 커녕 오직 한 가지 욕구만이 솟구치게 된다. 당장 그 자리에서 아이를 죽여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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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같은 작가의 작품들을 섭렵하는 경우가 드문데, 그건 뭐 나의 독서 속도는 느리고 읽을 책은 많기 때문이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말로센 시리즈도 물론이고 다니엘 페낙의 작품이라면 다 읽어보고 싶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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