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요즘은 책은 꽤 읽는 편인데, 전엔 잘 읽지 않았던 종류의 책이랄까 그런 것들도 많이 읽었다. 뭐 예전에도 잡식성이니 딱히 달라진 건 없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여기 쓸 감상보다는, 책 내용 중 인상 깊었던 말들이나 다시 곱씹으며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들 위주로 옮겨 적어놓기는 하고 있다. 저작권이란 것이 워낙 애매하니 그냥 비공개로 대부분 두고 있다.
그래도 간만에 옮겨적기 보다는 감상을 쓰고 싶었던 책이 있어 공개로.
아직 여기 후기를 올리지 않은 이번 여름휴가 때 읽은 책이다.
휴양지로 떠난 여름휴가에 아무것도 안하고 책을 세권쯤 읽고 올 요량으로, 그래도 세권은 너무 무거워 두권 챙기고, 혹시 모자랄까봐 두권 더 e-book으로 아이패드에 담아갔다. 결과적으로는 5박7일 동안 그리 두껍지도 않은 이 책만 절반 조금 넘게 읽고 왔다. -_-;
오랫만에 읽은 물리학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때 물리학도를 꿈꿨으나 이젠 고등학교때 배운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인지 일반상대성이론인지도 헷갈리는 나같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현대 이론물리학을 매우 비유적으로 최대한 설명해보려 노력하는 책이다.
물리학자라도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이탈리아인이라서일까.
다소 뜬금없이, 이 책은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단지 눈길을 끄는 도입으로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과거 그리스 학자들의 직관과 영감이 얼마나 훌륭했으며, 현대의 물리학이 발견하고 그려내는 세상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설명한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까지 암울한 시기가 이어지며 그리스의 유산들은 묻혔다. 다시 르네상스 시기부터 그리스의 유산들은 재조명되고, 온갖 학문과 함께 과학도 꽃피기 시작한다. 과학, 특히 물리학의 주요 성취들과 거기 기여한 주요 과학자들이 어떤 통찰로 새롭게 세상을 그려냈는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까지 쉼없이 설명한다. 가끔 수식이 나오지만, 그것은 공식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공식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단지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ㅎㅎ
뉴튼이 그린 세상이 공간과 시간과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면, 패러데이와 맥스웰이 발견한 세상은 공간, 시간, 장(field),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 세상은 다시 시공, 장, 입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년뒤 다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시공은 장과 합쳐져 세상은 장과 입자로 단순해졌다. 반면 역시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양자역학은 장과 입자를 합쳐 세상을 시공과 양자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모두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는 가장 성공적인 현대 물리학 이론임에도 이상하리만치 오랜 시간 잘 합쳐지지 못하였다. 아인슈타인도 양자역학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으니. (그게 맞긴 한데 좀 아닌 거 같아... 다른 근본적인 우리가 모르는 원리가 있지 않을까? 뭐 이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나는 지난 20년간 세상이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대부분의 과학에서도 20세기 초와 같은 커다란 발전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사실은 내가 공부를 안한 것이지만. 생물학 관련 책들 읽으면 더더욱.
그런데 이론물리학은 사실 엄청난 발전을 하였는가 묻는다면 이 책을 읽고도 잘 모르겠다. 저자에 따르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수학적 도구들을 가지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만큼 확실하게 검증되는 것도,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합치는 작업이랄까, 현재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이론들이 초끈이론과 루프양자중력이론이라고 한다. 초끈이론은 그래도 물리학에 조금 관심이 남아 있던 시절까지 들어본 이야기지만, 양자중력이론은 처음 듣는 내용이다. 로벨리는 양자중력이론을 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CERN이 끈이론에서 예상한 입자를 발견하는데 실패함으로 해서, 끈이론 지지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양자중력이론 지지자들 표정이 좀더 밝아진 정도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기여하고 지지하는 양자중력이론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세련된 결론으로 보이는지 설명하고, 마지막 장에서는 좀더 과감하게 본인이 생각하는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기까지 한다.
인상적인 것은, 양자역학(혹은 양자중력이론)이 발견한 이 세상은 고전물리학이 그리는 세계와 달리 유한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주아주아주 작기는 하지만, 공간은 더이상 작아질 수 없는 크기가 있다. 아주 작은 공간을 관찰하고자 할때, 그 공간 안에 입자를 놓는다면 양자역학에 의해 입자는 달아나고, 공간이 작아질수록 입자는 더욱 빠르게, 그러니까 높은 에너지를 지니게 된다. 에너지는 공간을 휘게 하는데, 작은 공간에 에너지가 집중되어 공간이 블랙홀처럼 휘게 되면 입자는 그 속에 빠져들어 더 이상 관찰할 수가 없다. 이 한계가 되는 길이가 바로 플랑크 길이. 그러니까 아날로그의 세계라고 하여 무한히 작게 나눌 수 있어 무한한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가 그리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요소는 '정보'다. 열도, 시간도, '정보'라는 하나의 요소로 설명 가능하다.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는 없고, 모든 것은 '정보'의 흐름일 뿐이다.
뭔가 소름이 끼쳤달까. 최근에 읽은 DNA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Genome Express'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생명의 '정보' 전달 기재도 노골적인 'digital'이었다. (물론 전달한다고 다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를 떠나, 아예 이 세상은 유한한 '정보'와 그 흐름일 따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워낙 난해하고 우리의 인식 체계와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의 말을 내가 느끼는 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만, 과학만을 굳게 믿는 현대의 물리학자가 이야기하는 '신비'라니.
저로서는, 우리의 무지를 직시하고 받아들여 그 너머를 보려고 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쪽이 더 좋습니다.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미신과 편견에 빠지지 않는 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정직한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더 멀리 보려고 더 멀리 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놀라운 것들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사랑을 하는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배우고 발견하고 싶은 호기심, 언덕 너머를 보고 싶은 바람, 사과를 맛보고 싶은 바람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단테의 율리시스가 동료들에게 말하는 구절에서처럼, 우리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탁월성과 앎을 추구하기 위해 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조상들이 우리에게 해준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특별하고 심오합니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비감을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우리는 세계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특히 종교에 대해 리처드 도킨스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이 세상의 '신비'를 이야기하면서도 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도킨스가 과학으로 결국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느낌인 반면, 로벨리는 겸손함을 잃지 않고, 무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내 이성은 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다른 스탠스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계속해서 쉬운 답을 내고 싶은 충동을 완전히 잠재우기는 힘들다. '무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좀더 생각해봐얄듯.
(P.S.) 영화 '매트릭스'를 특별히 기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다시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_-;;;
(P.S.2) 요즘 읽은 칼융이나 조지프 캠벨 같은 사람들의 책에 대해서 로벨리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이 책에서 '직관'이란 말이 여러 차례 나온 것이 무척 흥미로왔다.
(P.S.3) 아인슈타인이 도입했다 철회했다 다시 인정받은 우주상수 관련해서 찾아보다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우주상수는 0이 아닌 매우 작은 값인데, 그 값이 아니었다면 우주는 매우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왜 하필 그 값인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나온 설명 방법 중 하나가 '인간 중심 원리'라고.
그러니까 수없이 많은 다중우주가 있다면 각각은 서로 다른 상수들을 가지고 있는데, 인류는 그중
우리의 우주와 같은 상수를 가진 우주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상수들이 조금만 달랐어도 아예 은하나 별들조차 생기지 않는 단순한 우주이기 십상이라고.
정말이지 우연같지 않은 우연들, 이 우주에는 뭔가가 있긴 있을 거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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