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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inerary/15 : Turkey

Olympos

by edino 2015. 4. 12.

보통 국민코스에서 터키 남서쪽으로 오는 것은 파묵칼레와 셀축이 주요 목적지이나,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안탈리아와 카쉬다. 안탈리아는 공항 때문에라도 들르기 용이하나, 카쉬는 큰 이유도 없이 꽂힌 목적지라 여길 가기 위해 다른 한두 곳은 포기했을 정도다.


안탈리아와 카쉬 사이에는 올림포스가 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가는 곳은 아니고, 여름 한철은 주로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것 같다. 가이드북에도 아주 적은 분량만을 할애하고 있다. 들어본 적도 없고, 가이드북의 사진에서도 별로 끌릴 만한 요소도 없고, 방문할 목적지 리스팅 할 때 전혀 고려했던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도 있겠다 가는 길에서 조금만 빠지면 되는지라, 게다가 오히려 넓거나 볼거리가 많지 않은 것 같으니 잠깐 들러가기 좋을 것 같아 들러가기로 결정.


3주간 여행 일정 동안 데이터 로밍은 비용 부담이 좀 커서, 한국에서 오프라인으로 이용할 수 있는 네비게이션 프로그램과 터키 지도를 다운받아 갔다. 운전 뿐 아니라 초행인 곳에서 걸어 다닐 때에도 로밍을 했다면 구글 네비게이션/맵이 진리지만, 없다면 대용으로 내가 받아간 Navigator라는 앱도 쓸 만하다. 가장 큰 장점은 공짜라는 점, 그 이외에 장점은 별로 없다. 뭐 유료 앱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매우매우 큰 도움이 된다. 이 앱에서도 맵을 유료 버젼인 TomTom 맵을 받을 수는 있다. 사실 Navigator 앱의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기 위해 한국에서 무료 맵을 다운받아 몇번 시험삼아 써봤는데... 포기했다. -_-;; 주소 지정하기도 어려웠고, 길 안내도 유턴해서 우회전해서 가야 할 곳을 바로 좌회전하라고 하질 않나..


뭐 그래도 궁하면 통한다. 주소 지정도 나중엔 요령이 좀 생겼고, 무엇보다 대부분 시골길이나 그리 크지 않은 도시를 다니는 것이라 큰 문제가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국도 같은 곳을 달리다 약간 내륙으로 들어가는 듯 싶더니, 네비게이션에서 가리키는 좌측 방향으로 Olympos 표지판이 있었다. 진입할 때 길이 저 정도였고, 점점 도로 포장 상태가 나빠지고, 점점 거친 자갈들로 이루어진 길이 나온다. 내가 든 보험이 타이어 펑크도 포함이 되던가 고민될 정도로 심히 안좋은 도로 상태. 꽤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데, 오가는 차는 거의 없고, 나중엔 아예 얕은 시내가를 건너야 한다. 길 맞나? -_-;;



그래도 꿋꿋이 네비를 믿고 가다보니 뭔가 사람들도 좀 있는 곳이 나오긴 한다.

물 맑은 계곡.

이것 만으로도 와보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계곡을 가르지르는 쇠줄로 연결된 다리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잘 보면 물 안에 드문드문 오렌지 같은 것들이 보이는데, 처음엔 차갑게 하려고 사람들이 넣어둔 건가 했는데, 떠내려오다 얕은 곳에 걸려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 계곡을 따라 양옆으로, 주로 호스텔 수준의 숙소들과 거기 딸린 식당들이 있다.

어느 곳이나 번듯한 건물은 거의 없고, 심지어 나무 위에 나무로 지어둔 오두막 숙소도 있다.

고대도시(리키아) 유적지나 해안가로 가려면 왼쪽으로 건너서 가면 된다.



산과, 계곡과, 바다라.

나는 어릴적 가족끼리 설악산/동해안 놀러갔던 기억이 참 좋다.

산도 있고 계곡도 있고 바다도 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때만 해도 설악산 계곡가에서 밥을 해먹고 설겆이도 계곡물에서 하고 그랬다.

지금처럼 대단한 캠핑장비는 상상도 못할 때고, 가족마다 가스 버너 한개, 코펠 한 세트면 다 되었다.

하나에선 밥을 짓고, 한쪽에선 찌개 끓이고, 한쪽에선 고기 굽고.

삼층밥 되기 일쑤인 그 밥에, 깊은 맛과는 거리가 먼 대충대충 된장찌개, 거기에 고기를 구워 먹는게 그리 맛나고 재미있을 수가 없다. 지금은 아예 할 수가 없는 일이라 더 그립게 느껴질지도.



아무튼 올림포스도 계곡과 산과 바다가 한 곳에 어우러져 있다.

잘 보면 암벽등반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거기에 올림포스는 한가지 더, 옛 도시의 흔적들이 있다.

워낙 오래전의 유적이라 그다지 성한 모습은 없지만, 이곳에 지금보다도 훨씬 번성했을 2천여년 전의 도시를 떠올려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바다로 통하는 유적 입구에는 입장료를 받는데, 입장료 받는 곳 바로 지나서는 신분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도굴당한 묘가 있다. 역시 비수기라 인적이 드물다.

유적지를 지나다 보니 이렇게 쨍한 대낮에도 약간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바다로 향하는 길 양쪽으로 또다른 유적들로 향하는 길들도 있지만, 올림포스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아 바다로 향하는 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앞에 보이는 구조물을 처음엔 배모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가까이서 보니 다리의 교각 흔적인 것 같다.



계곡이 강도 아니고 바다로 바로 흘러드는 곳.

막힌 것도, 뚫린 것도 아니다.


사진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바다로 향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경만으로 얼마나 벅차올랐는지.



계곡 쪽에선 오리떼도 헤엄치고 있고.



바닷가엔 그래도 사람들이 좀 있다.

이 길 아닌 길은 자연적으로 생긴걸까 사람이 만든 걸까.

물수제비 하고 싶게 만드는 넓적한 돌들이 널려 있다.



이곳도 이렇게 수영과 일광욕을 할 정도로 덥다 할만한 날씨였는데, 멀리는 설산이 보인다.



이 커다란 바위 위쪽에도 옛 도시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곳의 물과 햇빛과 바다의 색은 아주 묘하게 나른하다.

이곳은 지금은 쇠락하였지만 한때 분명히 신들의 휴양지였을 것만 같다.

게다가 이곳의 이름은 올림포스.


여기서 휴식을 즐기던 신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곳처럼 쇠락하였으되, 여전히 눈부실까?

왜 그들은 이곳을 떠났을까?



말도 안되지만 정말 이런 생각이 계속 드는, 황홀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드는 신비한 곳이다.

저기 앉은 둘은 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먼 훗날 저들은 오늘 이곳의 빛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궁금한 게 많아진다.



올림포스가 내가 가는 길 사이에 있었고, 내가 차를 렌트한 것이 큰 행운이었던 시간들이었다.

아쉽지만 이미 올림포스에서 예정했던 시간은 훌쩍 넘겼다.
걸어 나오는 길에 한 식당에서 뒤름 케밥과 음료수를 늦은 점심으로 먹고 올림포스를 떠났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사람들마다 매우 다르게 기억할 것 같다.

나중에 셀축에서 만난 한 친구는 올림포스에서의 시간이 악몽이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천둥번개 치는 날씨에 교통편도 마땅치 않은데 어렵게 어렵게 이곳에 와서, 거의 텅 비다시피한 이곳에서 1박을 하는데 정전까지 되었다고. 다음날 유적이고 바다고 날이 밝자마자 나왔다 한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끔찍할 것 같은 상황이다. 물론 좀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나에겐 이토록 황홀한 시간을 무척 짧게 보낸 곳인데, 다시 오게 될까? 아닐 것 같다.

만일 젊은 배낭여행객들이 가득한 성수기에 왔다면, 나는 이곳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겠지.

하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신들이 떠난 곳엔 신들과 더 닮은 육체들이 머물다 갈 만한 곳이다.

나는 그곳을 슬쩍 들여다본 것만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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