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연습을 시작한지는 벌써 5년쯤 되었지만, 초반에 3개월 정도 바짝 배우고, 이후로는 아주 가끔씩 연습, 그보다 더 아주 가끔 필드에 나간 까닭에 여전히 타수는 말하기 민망할 정도다. 비용이 비싼 건 둘째치더라도, 마땅히 멤버 구성이 잘 안되어서 필드는 1년에 한두번 정도 나갈까 말까 여전히 경험부족인지라, 스스로 생각하는 기본기에 비해서도 점수는 훨씬 더 형편없다. 게다가 레슨을 받은지 오래되다 보니 폼도 조금씩 흐트러져서 만성적인 드라이버 슬라이스에 너무 많은 OB들을 내었다.
특히 작년 청명절 연휴에 나갔을 때에는 너무 짜증날만큼 슬라이스가 나서, 급기야 다시 10회 레슨을 받았다. 그걸로 그래도 꽤 자세를 다시 잡았는데, 덥다고 여름에 쉬고, 짧은 가을과 추운 겨울도 그냥 보내버리니 벌써 1년이 후딱 지나버렸다.
지난주 화요일은 그렇게 갈고 닦다가 만 실력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1년만의 기회였다.
그것 참, 날을 잡아도 참. -_-+++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 하였어도 설마 예보가 맞으랴 하였고, 전날 밤부터 꽤 세게 내리는 봄비를 보고도 설마 계속 이렇게 오랴 하는 마음으로 새벽부터 일단 출발. 정말 줄지 않고 줄기차게 온다. 그래도 간 것이 아까우니 일단 우산 쓰고 나섰다. 우산 쓰고 티 꽂고 우산 내려놓고 연습스윙도 제대로 없이 휘두르고 다시 우산 쓰고. 급기야 3홀째 정도를 치고 있으니 눈비가 되었다. ㅠㅠ
위기는 기회라고 하였나. 이날의 Play of the Day는 세번째 홀에서 나왔다. 홀까지 170m 거리의 Par 3.
몸이 풀렸고 잘 맞는 날이라면 4,5번을 잡겠지만, 워낙 상황도 열악하고 앞에 Hazard도 있는데다 몸도 덜풀려 별 망설임 없이 3번 아이언을 잡았다. 숏티를 꽂고 공을 올려두고 신중하게 자세를 잡은 뒤 공과 그린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이정도 집중된 정신이라면 연습스윙 따윈 필요없다. 3번을 잡았으니 무리한 백스윙도 필요 없다. 정확한 임팩트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follow through! 공의 궤도는 정확했다. 동행자들의 감탄.
그.런.데. follow through를 마친 나의 왼손에 약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아뿔싸! 그제서야 왼편 45도 각도로 시야를 돌려 바라보니 나의 3번 아이언은 하염없이 공중을 날아가고 있었다. 흡사 2001 Space Odyssey 도입부에서 유인원이 동물뼈를 던지는 그 유명한 시퀀스가 떠오르던 우아한 비행. 우주선으로 바뀌어 날아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그 순간.
그리고는 그대로 Hazard에 퐁당. 그냥 그렇게 빠졌다면 이 샷이 전설이 될 이유는 없었을 터. 나의 3번 아이언은 깊지 않은 Hazard에 빠지면서 꼿꼿한 입수 자세를 유지, 마침내 바닥에 우뚝 박혀서 수면 위로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캐디는 무전으로 도움을 요청하며 물 어디쯤에 빠졌는지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는 말없이 나 여기 있소라고 웅변하고 있었다.
공은 물론 정확히 On Green이었다. 아마 맞바람만 아니었으면 Hole in One도 가능했을 것. 그랬다면 나는 내 3번 아이언을 그냥 그자리에 두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후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또하나의 전설이 되었겠지. 아쉽지만 하늘이 돕지 않았으니 3번 아이언의 회수를 부탁하였다. 아마도 아무나 뽑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골프계의 아더왕급 되는 자만이 뽑을 수 있었으리라.
이틀후 택배로 돌아온 3번 아이언은 다른 아이언들과는 확실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른 아이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몸값, 그에게 따라 붙은 착불 무려 7천원!
변명하자면 3번 아이언이 내 손을 떠난 것은 장갑과 오른손 모두 비에 흠뻑 젖어서 너무나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뜻이라고밖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암튼 눈은 점점 더 오고, 젖은 손은 얼어서 곱기 시작했고, 젖은 바지도 말할 것도 없고. 무시무시한 눈을 동반한 맞바람에 앞을 보면서 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퍼팅하느라 잠깐 우산을 내려놓은 사이 그 우산이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 또 Hazard에 퐁당. 다행히 펴진 채 거꾸로 퐁당하여 바람에 물가 가장자리까지 떠내려 왔다. ㅋㅋ
결국 이날의 모험은 5홀까지였다. 캐디도 은근히 그만쳤음 했는지 이런 날씨에는 골프장에서 3홀 단위로 끊어서 계산해준다고 했다. 캐디피는 반을 주고, 그린피는 6홀까지로 계산하고 왔다.
일주일도 안지난 오늘 서울 낮기온은 20도를 넘는다는데, 뜬금없는 4월에 이번 겨울 가장 많은 눈을 이날 본 듯 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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