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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s/reading

관계 : 사랑과 애착의 자연사

by edino 2010. 9. 9.

오랫만에 읽은 인문학 책인데, 아빠로서 삶을 살게 되니 이런 목차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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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애착을 둘러싼 몇 가지 비밀을 찾아서
-비교행동학적 태도를 중심으로

1부 어머니
탄생 이전의 생애
의미의 탄생
개인사의 생물학
아버지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2부 부부
성이 나타날 때
사랑의 흔적에서 평온의 애착
한 쌍이 만들어지는 방법
섹스의 죽음

3부 애착의 부재
쓰레기통에 버려진 아들, 왕자 같은 아이들
애착, 후속과 결말

나오며/ 어째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옮긴이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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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회사서 빌려 읽다보니 부담없이 넘겨가며 볼 수 있어 좋다. ㅎㅎ

저자가 워낙에 여러 방면의 지식들을 펼쳐 얘기를 풀어나가다보니 집중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어째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하는 식의 태도로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가다 보니, 무언가 주장을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나열하는 식이 아니라, 이 얘기를 했다 저 얘기를 했다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에 관찰자의 의도가 반영된다는 사실을 여러 예로 들어가면서까지, 성급한 주장을 펼치는 것을 꺼리는 태도를 견지한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것은 크게 봐서 동물행동학과 심리학적 관찰들을 병치시켜가는 구성이다.
어느 종류의 기러기 무리에서는 부부관계가 돈독한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기러기가 청소년기가 되면 더 반항을 일삼고 가정을 뛰쳐나간다던가, 어떤 원숭이 무리의 수컷들은 장성해도 자신의 모친이 발정기가 되어 돌아다니면 구석에 가서 눈가리고 숨어서 근친상간을 피한다거나, 또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분리되어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새끼는 후에 어미와 만나면 근친상간을 피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동물행동학적 관찰 내용들..

그리고는 인간에게 있어 가정에서의 관계의 순환에 관한 이런 글..

욕망의 향방을 바꿔놓는 근친상간의 억압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안해내고,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모험을 펼치도록 만든다. 이처럼 가정 내에서 성적 쾌락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혜택은 엄청나다.
청소년들은 가정 내에서는 침울한 분위기를 조장하고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고 열광하는 태도를 나타냄으로써, 가족 구성원 간에 성적 교류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이처럼 주체가 자신의 가정을 만들기 위해 원래 가정과의 결별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는 경우에도, 사랑의 죽음을 통해 혜택을 이끌어내야 하는 날이 다시 찾아온다. 타오르는 사랑은 가정을 박차고 나오게 만들지만, 이같은 격렬한 감정이 나중까지 지속된다면 위험이 찾아올 수 있다. 사랑의 뜨거운 불꽃이 꺼져야만 비로소 안정적인 애정이 형성될 수 있고, 자녀들에게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울타리를 제공함으로써 삶의 비전을 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녀들 역시 나중에는 이 울타리를 거추장스런 제약으로 여기겠지만......
사랑의 죽음은 출생률을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자연적인 수단이다. 교회가 인정하는 유일한 산아조절 방식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론 에로티시즘을 죽이고, 유희의 기쁨과 탐구욕, 애교와 공모를 없애야 한다. 그 나머지는 애착의 몫이며, 결국 섹스는 애정이라는 침묵 속에 잠겨버리게 될 것이다.

청소년기의 반항을 근친상간 회피 메커니즘으로도 보다니 재미있다.
그리고 결혼 연차가 좀 되는 유부들이 부부간 스킨쉽 등에 대해 농담처럼 하는 얘기,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냐." ㅎㅎ
결국 인간사란 부모와 애착으로 맺어졌다, 그것을 끊고 가정 바깥에서 사랑을 찾고, 다시 가정을 이뤄 그것을 죽이고 가족간 애착의 관계를 형성하는...

내 동생이 주로 하는 아기를 위로 들어올리는 행동이 얼마나 남성들에게 있어 일반적인 행위인지, 갓난아기일지라도 성별에 따라 엄마들의 스킨쉽 패턴이 다르다는 사실 등도 재미있다. 아버지는 아기에게 어떻게 의미지워지는지에 대한 얘기도 흥미롭다. 아기에게 어머니의 존재가 베이스캠프같은 것이라면,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아기와 바깥 세상과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몸의 사용을 통한 학습이 거의 사라져가면서 아버지의 역할 또한 축소되고 있다는 얘기.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나중에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몇몇 관찰사례도 흥미로왔다. 어쨌거나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는 것도 중요하고, 아이가 주변에서 보여지는 기대 또한 중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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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문제인지 원래 문체가 그런지, 구성까지 더해 집중이 잘 안되는 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
그래도 이 책도 그랬고, '맨왓칭'이나 '털없는 원숭이' 같은 데즈먼드 모리스류의 책들이 내게는 참으로 흥미롭다.

인간이 동물에서 그다지 많이 못벗어났다는 사실은 오히려 편한 마음도 들게 한다.
가끔 인간 사이의 관계들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할 때 이런 책을 들여다보면 좀더 쿨해질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조직생활에 피곤할때 '아, 얘네 지금 수컷 위계질서 놀이 하는구나. 까짓거 장단 맞춰 놀아주지' 한다거나,
벽에다 얘기하는 게 훨씬 덜 답답할 것 같은 사춘기 자녀를 대할 때 '아, 이놈이 종의 오랜 근친상간 회피 메커니즘을 구현하고 있구나. 곧 바깥에서 짝지을 때가 되가는군' 이렇게 조금 쿨하게. ㅎㅎ

뭐 그게 맘대로 된다면야 이미 득도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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