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만해선 책을 잘 구입하지 않고 빌려본다는 얘긴 여러 번 했을텐데, 최근엔 그것도 모자라 Kiwi의 옛 책들과 더불어 yeon과 나의 책들까지 일부 정리하였다. Kiwi는 곧 고등학교도 가고 10월쯤엔 이사도 예정되어 있어서 일단 오래된 문제집 따위를 정리하다가, 기세를 몰아 다른 책들도 굳이 책장에 없어도 될 것들을 추려 버릴 것과 팔 것을 나눴다. 나누는 기준은 단순히 사가는 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요즘은 낱권도 ISBN 바코드를 찍어보면 얼마에 매입하는지까지 나오는 곳들이 있다. 대부분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긴 한데,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단돈 500원이라도 받고 누군가 본다면 자원 재활용 관점에서 좋은 일인 것이다. 그렇게 찍다보니 모여서 중고책 판매로 거의 9만원 가까이 받아왔다. 그 중고서점의 시스템은 매입을 안하는 책은 공짜로도 안가져간다. 중고서점에서 매입을 안해서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린 책의 양도 그 이상. 매입 안되는 책 중 몇 권은 책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회사에서 사준다던가 이런저런 이유로 책들을 소유하게 되기도 하는데, 오늘 글을 남기는 책은 우리집에 온지 3년쯤 된 것 같다. (주로 회사 도서관에서) 대출 순서에 따라 정해진 기간내에 읽어야 하는 책들에 우선순위를 내주기 때문에, 일단 '소유'하게 된 책들은 꽤 오랜 시간 집 책꽂이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곤 한다. 특히 두께가 두껍고 정독이 필요한 책이라면, 그 책들이 읽히는 건 은퇴후에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참고문헌 빼고 280페이지 정도 밖에 안되는 책이라, 대여한 책들이 없는 기간에 읽기를 이미 몇번 시도했던 적이 있다. 해외여행도 한두번 다녀왔을 것이다. 앞부분부터 엄청나게 흥미를 확 끌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대충 빨리 넘기면서 보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단순 에세이도 아니고, 본격 문학 평론도 아니고, 내가 읽어온 다른 책들과 결이 다르기도 하다. 앞에 50페이지쯤 읽다 다른 대여한 책들에게 다시 순서를 내주고, 그러다 다시 한참 만에 보려 하니 다 까먹어서 처음부터 보기도 했다. 그러다 작년 연말부터 대여한 책들은 다보고 대기중인 책들은 한참 남은 기간이 꽤 오래 지속되어, 마음 먹고 이 책을 완독하기로 하였다. 읽을수록 흥미가 생겨, 결국 다 읽고 블로그에까지 남기게 되었다.
무엇에 끌려 이 책을 구매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짐작이 간다.
영어 원제는 On Not Being Someone Else: Tales of Our Unled Lives.
나도 관심이 있어서 집었을텐데, 책 머리에 영문학자인 저자가 밝히는 '내가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고 느껴졌다. 사실 유별난 정도니까 이 주제에 관해 이 정도 책을 썼겠지만, 사실 형태는 다를지언정 수많은 문학과 영화 등 예술작품에서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 직접적이고도 노골적이어서 첫머리에서부터 언급되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부터, 칼 데니스의 시 '당신을 사랑하는 신', 헨리 제임스의 '밝은 모퉁이 집'(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기묘한 느낌의 소설), 영화 '멋진 인생'(1946년에 나온 이 영화를 이 책 때문에 찾아보게 되었다), 이언 매큐언의 '속죄'(이 소설 원작의 영화 '어톤먼트'는 보고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원작 소설이 얼마나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이런 문학평론가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차이로 가장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흥미로웠던 여러 현대 영시들 등등. 꽤 여러 페이지들을 할애해 분석한 앞의 작품들 외에도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언급된다. 그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살지 않은 삶'에 대한 얘기와 이어지는지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얘기한다. 그리고 수많은 인용과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주 능수능란하게 오간다. 저자가 직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문학)에 대해 주로 쓴 책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한 주제에 관해 다양하게 인용한 것을 보면, 저자가 오래전부터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료들을 모아두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인용했고, 나도 인용하고 싶은 많은 구절들이 있었지만, 역자의 말이 이 책을 잘 요약한다.
저자가 인용한 작품들도, 저자의 해석도 모두 흥미로웠지만 내가 이 책에 완전히 빠져든 시점은 저자가 "살지 않은 삶은 중년의 관심사"라고 말한 순간부터였다고 고백해야겠다. "살지 않은 삶이 있으려면 먼저 삶을 어느 정도 살아야만 한다. 미래에 다른 삶을 살 가능성들이 거의 사라졌다고 느낄 때면 어김없이 과거에 선택하지 않은 길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설명이 마치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가능성을 하나씩 차례차례 내려놓는다." 그러다 "깨달음의 시기, 자신의 삶의 형태가 이미 정해졌으며 지평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꼼짝없이 인정해야 하는 시기, 대통령이나 백만장자가 될 리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조금씩 꺾이고 깎인다." 그러나 어쩐지 억울하다. 지금 이 삶에 딱히 불만이 없다 해도 힐러리 맨틀의 말대로 "우리는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로베르트 무질의 말대로 내가 "이런 사람으로,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할 절대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함으로써 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한다. 우리는 이 사건과 저 사건의 관계를 발굴하고 증명하기 위해 대안을 고안한다. 그리고 영화나 문학 작품을 통해 그런 관계를 발굴하는 기술을 연마한다.
아니면 저자가 본문의 마지막 장을 할애한 인용문도 이 주제를 관통한다.
한순간의 선택이 다른 선택을 배제한다는 자각, 그 어떤 순간도 다른 순간을 대체할 수 없다는 자각, 한순간의 의미는 그로 인해 포기하는 모든 것이라는 자각만큼 중대한 깨달음의 순간도 없다. 그것이 향상의 순간이다. 아름다움과 중요성은, 젊은 시절은 예외지만, 상실에서 탄생한다. 마지막 자각은 그런 상실에 대한 자각 또한 사라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세상이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관념은 청소년기의 고통이자 위안의 출처다. 어른이 되어서 얻는 유일한 이득은, 그런 가능성의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정의는 실재,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일한 세계의 진실, 그 세계가 존재하며, 내가 그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주는 고통과 위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 Stanley Cavell, 눈에 비치는 세계(The World Viewed)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이 살지 않은 삶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에 답을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시 한 번, 아니 여러 번 곱씹어보게 하기는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살지 않은 삶을 떠올릴 때 그 갈림길이 되는 것 중에 흔한 것이 전공이나 학교, 직업이나 직장, 배우자, 가족(특히 자녀) 등이다. 어떤 것들은 자신이 선택했거나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고, 아닌 경우도 있다. 현대에 와서 특히 직장같은 경우는 바꾸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러 번 바꾼 것들은 오히려 '내가 그걸 선택 안하고 이걸 선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덜 하게 한다. 아무래도 평생 한 직장을 다닌 사람이 여러 직업을 가져본 사람보다 안해본 일에 대한 생각을 더 할 것 같다.
그래서 중년이 되어서, 그럴 능력이 되면, 살지 않은 삶도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만일 그 중년이 부자라면, 살지 않은 삶을 살아보고자 시도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결혼을 다시 하는 것 아닐까. (한국적인 상황일 수도 있고, 편향된 주변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아무리 중요한 무언가를 바꿔도, '살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욜로족이 아니어도 누구나 You Only Live Once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바꾼 결과가 별로 안좋다면, 다시 원래 가던 길을 생각하는 빈도가 늘어나진 않을까.
가지 않은 길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거나, 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가지 않은 길을 그리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거기 집착하는 인물들이 나오는 작품들을 보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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