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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iments/reading

by edino 2019. 10. 21.

테드 창의 많은 팬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또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로 인해 그의 팬이다.

그의 팬 노릇을 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가 과작의 작가이면서, 또한 중단편만 쓰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가 되면 이렇게 작품들을 빠짐없이 묶어 내놓으니 그때그때 발표될 때마다 찾아 읽지 않아도 된다. 30여년 동안 2권, 17편의 중단편. 생계를 해결하는 직업이 따로 있으면서 1, 2년에 한편씩 중단편을 쓰는 삶도 꽤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 더 많은 시간을 작품에 쏟는다고 더 좋은 작품들이 나오리라는 법도 없다. 시간과 함께 숙성되어 나올 수 있는 글들도 있으니, 어쩌면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더 좋은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능가하는 작품이 없을지라도, 이정도 퀄리티와 이정도 속도로 발표되는 작품들은 의리로라도 빠짐없이 읽을 수 있다. (뭐든 너무 많은 시대, 아무리 좋은 음악을 하더라도 뮤지션들도 과작이면 좀더 애정이 간다.)

 

이하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다른 세계의 다른 설정으로 풀어 썼으나, 그다지 신선한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서늘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가 인상적.

 

우리가 해야 할 일

아주 단순한 장치 하나가 인류의 1/3 정도를 코마같은 상태로 몰아간다는 설정. 미생물도, 화학약품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증명시켜주는 단순한 장치가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설정을, 그 단순한 장치만큼이나 심플하지만 생각은 복잡해지게 풀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이 소설은 나에게 불가사의한 경험을 안겼다. 우선, 나는 여기 실린 소설들 중 이 소설만 유일하게 제목을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따로 출판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50여 페이지이지만, 테드 창 소설 중에는 가장 긴 분량이라 조금 부담을 가지고 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기시감을 넘어, 내가 이미 이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도무지 없다. 2010년에 발표된 소설이지만 내가 영어판을 봤을리는 없고, 번역본이 나온 것은 2013년이니 6년 밖에 안된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억이 안날 수 있다니. 우리집에 그 책이 없는 건 물론이고, 회사 도서관에서 빌린 흔적도 없다. 주변에 그 책을 빌려줄 만한 사람도 떠오르지 않고, 심지어 그 책의 번역판 표지를 찾아봐도 완전히 낯설기만 하다. 읽을수록 내가 그 책을 전에 읽었다는 것은 확실한데, 읽고 나서야 전에 봤다는 생각이 들 뿐, 소설속에서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또 전혀 생각이 안난다. 결국 조금 띄엄띄엄 다시 다 읽고야 말았다. 기억 증발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토록 일상적인 기억이 사라진 것은 나름 충격이다.

 

컴공과 물리를 전공했고, IT회사의 technical writer로 일한다는 저자의 본격 전공 소설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세부적인 설정들이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또 이야기도 상세해지다 보니 길어진 게 아닐까 싶다. 발표된 시점을 보면 충분히 선구적인 주제인데, 너무 빨리 훅 다가온 인공지능 열풍으로 인해 현 시점에서는 다소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소재가 되었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해리 할로우의 원숭이 애착 실험이 생각나는 소재를 인간 버젼으로, 스팀펑크 분위기로 그렸다. (스키너가 자식을 대상으로 그런 실험을 했다는 헛소문이 실제로 많았다고 한다.)

가상의 인공 유물들을 동원한 박물관 전시회라는 아이디어로 편집된 앤솔로지의 일환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화가가 삽화를 그리고, 그에 붙는 설명문 형식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앤솔로지라고 하니, 그림들이 어떤지 궁금증이 생긴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비슷한 내용을, 완벽에 가까운 기술이 불완전한 인간 기억과 만날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의 SF로 풀어냈다. 저자는 life logging 개념을 90년대 후반에 처음 접했다고. 언어에 대한 저자의 여전한 관심이 드러난 또다른 이야기가 병치되어 진행되는데, 두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는 느낌이 없어 조금 아쉽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읽으면서 '기억 증발' 사건도 있었고, 지금 읽고 있는 Oliver Sacks의 글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 현 시점에서 내 삶에 기억과 관련된 어떤 시사점이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고 있다. (프로이트는 기억을 삶의 단계별로 지속적으로 재전사(retranscription)되는 과정으로 보았고, 재전사의 오류를 신경증의 원인으로 보았다고 한다.)

 

거대한 침묵

비디오 아티스트 그룹과 공동작업의 결과물로, 비디오 작품의 자막으로 들어갈 텍스트로 만들어진 작품. 해당 작품은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페르미의 역설이 언급되면서, 그에 대한 가설 중 하나로 중국 SF 삼체에 나온 설정이 나온다. (삼체에 대한 평이 좋아 읽어볼까 하다가 분량에 질려 줄거리만 읽었는데, 꽤 흥미롭다.)

 

옴팔로스

이 책에서 그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화석들의 이미지는 매우 신비롭다. 신을 증명하는 신비, 하지만 그 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맞닿아 있는 자유의지에 관한 사색. 과학이든, 신이든, 우리의 자유의지를 무색하게 하는 것들이 객관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믿을 수 밖에 없다고. '숨'과도 이어지는 주제 의식. 

 

 

요기까지, 책에 나온 순서에서 빠진 것들이 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나의 best 2!

공교롭게도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타임머신과 아라비안 나이트가 결합한 SF인데, 셰에라자드가 한 이야기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라비안 나이트 풍에 잘 녹아들어 있다. 상대성 이론의 틀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타임머신은 과거를 바꿀 수도 없고, 상호모순 없는 단 하나의 시간선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러한 설정에서 마치 운명과도 같이 과거와 현재를 빈틈없이 잇는 소설속 설정들이 백미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나오는 장치도 이 소설에 나오는 가게에서 팔 것 같다.)

나이트 샤말란에게 '식스 센스' 이후 작품에도 은근히 반전을 기대하게 되듯이, 이 소설에도 결말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 급의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는데, 그러한 기대만 지우면 아주 좋았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단 하나의 시간선만이 존재하는 위 작품과 반대의 설정.

SF의 쟝르 팬이라기에는 읽은 것이 적으나, 평행세계를 이런 식으로 다룬 것은 매우 신선한 설정으로 느껴졌다.

꽤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엇갈리는 이 소설 하나로도 2시간짜리 영화 소재로는 충분하지만, 영화 하나로 끝내기는 아쉽고, 이 설정으로 드라마화 해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꽤 나올 것 같다. 주제는 다시 한번 자유의지에 관한 것으로 모아지지만, 이 설정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그보다 훨씬 많아보인다.

 

설정 자체에 주목하다보니, 모순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하나의 세계 A에서 누군가 프리즘 a을 활성화하여 A세계가 B1과 B2로 분기되었다고 해보자. 이때 프리즘 a도 두 세계로 나뉘어 각각 b1과 b2가 된다. 이후 B2세계에서 다른 프리즘 c1이 또 활성화되어 B2세계가 C1과 C2로 분기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B2세계에 있던 b2 프리즘도 각각 bc1과 bc2가 된다. 그러면 B1세계의 b1은 bc1과 통신이 되는 것인가 bc2와 통신이 되는 것인가?

 

이걸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보면, B2세계에서 c1이 활성화되는 순간, B1세계도 2개로 분기하는 가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프리즘 b1을 통해 B2와 연결되어 있던 B1도, C1과 연결된 세계(D1)와 C2로 연결된 세계(D2)로 분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순은 사라지는 것 같지만, 평행세계 한쪽에서 일어난 사건(프리즘 활성화)에 의해 다른쪽 평행세계가 영향을 받는(똑같이 분기가 일어나는) 일이 생겨난다. 게다가 프리즘 활성화에 의해 생겨난 2개의 평행세계(B1과 B2, 혹은 C1과 C2)는 서로 양자 하나의 차이가 있지만, 자신(B1)의 평행세계(B2)에서 일어난 사건에 의해 두개로 갈라진 평행세계(D1과 D2)는 양자 하나의 차이도 없이 두개로 분기된다. 오로지 서로 다른 평행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만이 다른 2개의 세계다.

 

결국 이 모순은 평행세계간의 통신이라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사실 두개의 평행세계는 프리즘 활성화와 같이 분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서로 정보의 교환으로 인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이는 세상은 실제가 아니다'에서의 주장처럼 결국 우주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면, 정보가 흐를 수 있는 평행세계란 결국 하나의 연결된 우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양자 프리즘 같은 장치는 한번 활성화될 때마다 우주의 크기를 두배씩 늘리는(같은 '공간'을 점유하지는 않더라도) 장치와 같다.

 

별로 문학적인 평가는 아니지만, 아무튼 평행우주가 저런 식으로 존재하거나 분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둘간의 통신만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정은 근본적인 질문만 접어두면 꽤 흥미롭고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영화 Arrival 이후, 이전 작품집에 실린 2편의 드라마화가 진행중이라는데, 나라면 이 작품을 top pick으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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