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비수기라고 방심했다. 핵심 관광지를 주말 일정으로 잡은 건 실수였다.
그래도 남은 일정이 주말 밖엔 없고, 오늘은 비도 꽤 와서 실내 위주로 다녀야 한다.
한참을 줄서서 들어간 아야 소피아. 이제는 대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박물관이다.
터키의 훼손된 기독교 성화 등은 이슬람보다는 주로 같은 기독교도들의 성상 파괴 운동에 의한 것이 많아 보인다.
훼손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런 날이 올 줄이라도 알았는지 성화를 파괴하기 보다는 덧칠하는 정도로 그쳐, 현재는 두 종교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는 박물관이다. 지금은 숨겨진 기독교 성화를 오히려 적극 드러내어 서구의(덩달아 한국의) 관광객들을 많이 부르고, 그래서 입장료를 많이 받을 수 있으니 터키 세속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느낌이다. (현 정권에서는 다시 모스크로 돌리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외양은 건너편의 블루 모스크 손을 들어주겠으나, 실내는 아야 소피아가 절대 밀리지 않는다.
윗층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점도 좋다. 저 모스크 특유의 조명들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예레바탄 지하저수조.
아야 소피아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 지하에 있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임에도 입구를 찾는데 좀 헤맸다.
실제로는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더 어둡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본 적 없는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와 비쥬얼이다.
나는 몹시 감탄하며 보았다.
이 저수조가 실제로 쓰였을 당시에는 지금 관광객들이 다니는 길은 없었을 것이고, 물은 훨씬 많이 차 있었겠지.
지금은 그리 깊지 않은 물이 있고, 물고기들도 풀어놓았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저수조를 만들 당시부터 기둥들을 전부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가져와서 쓴 것들이 많아 생김새나 굵기 등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게중에서도 특이한 기둥들은 이렇게 별도의 조명이 달려 있기도 하다.
특히 유명한 것은 이 메두사의 머리.
메두사 머리 2개가 가까운 곳에 놓여 있고, 하나는 이렇게 거꾸로, 하나는 옆으로 누운 방향이다.
왠지 이 메두사는 저 위쪽의 기둥과 어울리는데, 단지 높이를 맞추기 위한 밑돌처럼 깔려 있으니 왠지 불쌍하다.
당대(만들어진 당시 말고 여기 저수조에 쓰일 당시)에는 그냥 물속에 영영 잠겨있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이 지하 저수조에서 가장 조명받고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이 이 근처에 가장 많이 모여 사진도 찍고, 동전도 던지고.
이후에 들른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는 비슷한 메두사 머리가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바깥에 놓여 있으나, 누구도 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거나 사진 찍는 걸 못보았다. 정말이지 자리가 사람도 만들지만 자리가 유물도 만드나보다. ㅋㅋ
예레바탄에서 나와서 점심 먹을 곳을 찾던 차에, 셀축에서 같이 다녔던 여행자 한명을 우연히 만났다.
일정이 이스탄불에서 다시 겹치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여행자들끼리는 아무리 큰 도시에서라도 이런 일이 드물지가 않다.
그쪽이나 나나 이스탄불에만 일주일도 넘게 머물렀는데도, 여행자들의 동선은 그만큼 제한적이다.
그런데 이 언니는 예레바탄에서 막 나오는 길이라니까 대뜸 너무 시시하고 돈아깝지 않았냐고 한다. ㅋㅋ
사람들 취향은 역시 가지각색이다.
소욱 체쉬메 골목 등을 좀더 돌아보고, 안비싸고 맛나기로 나름 유명한 도이도이 레스토랑을 찾아가다 지나게 된 아라스타 바자르. 점심시간을 약간 지나서인지 식당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케밥 종류인 식사는 역시 만족, 가격도 이스탄불에서 이 정도면 꽤 만족.(음료수까지 17tl)
오늘 술탄아흐멧 광장 주변의 주요 관광지들은 다 보고 내일은 여유롭게 마지막날 일정을 잡으려 하였건만, 이미 톱카프 궁전까지는 도저히 무리인 시간. 사실 오늘 계획대로 다 보았다고 해도 내일 정말 일정을 여유롭게 잡을지는 모를 일. ㅎㅎ
일단 마감시간이 다소 빡빡하지만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까지는 가보기로 하였다.
전시 건물이 여럿 있어 천천히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지금의 터키 땅에 있었던 유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터키 땅을 지배했던 세력이 당시에 차지했던 드넓은 지역들의 유물들, 다른 나라와 교역이나 선물로 주고 받은 것들, 혹은 빼앗아 온 것들도 전시되어 있다.
강의 시간에 현재 터키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내에 갈 수 있는 나라가 몇 십 개라고 했더라?
여전히 터키는 길목에 위치하여 있고, 그래서 경제 또한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경제 성장률 같은 것도 변동성이 매우 심하다.)
한국과 참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지리적 위치다.
건물을 옮겨온 듯한 이쪽 전시실은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였는데, 마감시간이 거의 되어서 차분히 오래 보진 못하였다.
오후 5시 정도, 박물관 등은 닫을 시간이 되었으나 해는 지기 전이라면 역시 자미를 찾아다니는 것이 좋다.
6시까지는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먼저 갈라타교 건너편에 바로 위치해 있어 눈에 잘 띄는 예니 자미.
규모도 크고, 아마 터키에서 주변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자미가 아닐까 싶다.
내부는 그냥 적당한 느낌? ㅎㅎ
바로 주변에 므르스 차르쉬가 있다.
인파가 어마어마하다.
그랜드 바자르와 마찬가지로, 뭔가를 살 생각은 잘 안들지만 분위기 자체로 구경거리긴 하다.
사실은 예니 자미에서 가까운 뤼스템파샤 자미를 먼저 찾았는데, 인파에 휩쓸려 헤매다 보니 그저께 들어가보지 못한 슐레마니예 자미가 먼저 나온다. -_-;;
못들어가보았으니 여기도 들어가 보았다.
유럽의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보면 거기서 거기이니 굳이 찾아갈 만한 자미는 많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나가는 길이라면 또 들어가서 후회할 일은 없다. 자미처럼 입장료도 없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저께보다는 아직 밝은 시간이라, 오늘은 아이란스 골목을 지나가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인적은 드물고, 어디가 복원된 건물인지 방치된 건물인지도 구분이 쉽지 않은 분위기다.
이런 것도 볼 거리라면 볼 거리겠으나, 늦은 시간이라거나 여성 혼자라거나 등등의 경우라면 굳이 가볼만한 곳이라고 하기는 그렇다.
아이란스 골목은 하여간 좀 긴장이 되는 분위기라, 골목을 내려와 상가에 접어들고서야 긴장이 풀린다.
이때가 5시 45분이었는데, 6시가 되기 전에 뤼스템파샤 자미를 찾아갈 수 있을까?
브라보~ 지도 들여다보며 찾으려고 할 땐 못찾았는데, 무작정 방향만 생각하고 걸었더니 5분도 안되어 찾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규모가 다른 자미들보다 굉장히 작다.
아마 가이드북에 자주 소개되는 이스탄불의 자미들 중 가장 작을 듯.
푸른 타일 장식이 독특하고, 주변이 완전히 시장 한가운데인 점 또한 신기하다.
예니 자미는 자미 본당과 인파 사이에 버퍼가 되는 공간이 좀 있지만, 뤼스템파샤 자미는 그런 것 없이, 대신 한 층 위에 위치한다. 계단만 내려가면 바로 시장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미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또한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이 신기하다.
6시가 넘었으니 이제 자미 구경도 끝.
내일도 늦게까지 시간이 있긴 하지만 이스탄불에서 자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밤을 어디서 보낼까, 이미 여러번 건넌 갈라타교를 다시 한번 걸어 건너가 보았다.
카라쿄이 생선 시장은 이 시간에도 제법 사람들이 있다.
이스탄불에 온 둘째날 먹은 고등어 케밥을 내일 한번 더 먹어야겠다고 미리 결정.
마지막 저녁 만찬은 그보다는 좀더 분위기 있는 곳을 찾아보련다.
갈라타교에서 생선시장 반대쪽, 즉 카라쿄이 선착장 쪽은 한번도 안가봐서 가봤는데, 생각보다 분위기 좋은 곳들이 많다.
이스탄불에서 같이 수업 들었던 친구들과는 도대체 뭘 보고 다닌건지 모르겠다. ㅎㅎ
그때 지나다닌 동선 상에서 조금만 옆으로 빠져도 좋은 곳들이 참 많다.
하지만 대부분 혼자서 들어가기는 좀 망설여지는 분위기의 곳들이라, 다시 술탄아흐멧 광장 쪽으로 향했다.
저녁과 함께 물담배를 한번 해볼만한 곳을 찾는 중이다.
거리를 걷다 어떤 사람이 시간을 물어봤던가? 암튼 또 말을 걸었는데, 자기는 카타르 사람이란다. 그러면서 또 한국 얘기 나오고, 자기가 카타르 삼성에서 일했었댄다. 그러더니 또 이러저런 얘기 하다 저쪽에서 친구들이랑 맥주 한잔 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지 않으려나고 묻는다. 괜찮다고 하니 포기가 굉장히 빠르다. 안넘어올 것 같았는지 바로 안녕 하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져버렸다. ㅋㅋ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는 70% 이상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비슷한 경우를 스페인에서 겪어봤는데, 마드리드 전철역에서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하다 만난 그때 아저씨랑은 실제로 같이 저녁과 함께 와인도 한병 마셨다. (그래도 행여라도 약이라도 탈까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ㅎㅎ) 그 아저씨도 자신이 다른 나라 사람인데 여행객이라고 했고, 또 한국에 가봤다던가 일했었다던가 암튼 제법 알고 있었다. (깊이는 아니고, 서울 이외 부산 등등 몇개 도시를 더 아는 척 한다.) 1차에서 와인을 원샷하다시피 같이 빨리 나누어 마시고는 더치로 계산하고, 자기가 좋은데 안다고 2차를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전화로 예약을 해야 한다고 공중전화로 간다. 따라가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경고등이 켜진 가운데, 이것저것 누르더니 자기 카드가 안된다고 내 카드를 넣고 핀넘버를 넣으랜다. 푸흐, 날 바보로 아는게냐? 난 내 핀넘버 모른다고 계속 잡아 떼니 머라머라 열내다가 화내면서 혼자 가버렸다. ㅋㅋㅋ
'카타르에서 온 삼성 아저씨'는 나한테 무슨 속셈이었는지, 만일 사기꾼이었다면 어떤 사기를 치려했을지 좀 궁금하긴 하다.
아무튼 이 부근은 워낙 관광중심지라 분위기 좋은 노천 레스토랑은 많은데, 무쟈게 비싸다.
터키 최고의 물가 수준 아닐까 싶다.
전시된 메뉴판 등에 조금만 눈길을 주면 여지없이 호객이 따라 붙어서, 이런저런 눈치와 신경전 끝에 한 곳에 자리잡고 앉았다. 이스탄불의 호객은 정말 피곤하다. 관광지화 덜 된 곳은 인프라나 영어 문제가 있지만 마음만은 편했는데 말이다.
아쉽게도 이스탄불의 마지막 저녁 만찬은 꽝이었다.
여기 보이는 맛없는 음식과 맥주 한잔, 그리고 물담배까지 무려 74tl.
아무리 싼 음식점에서 먹어도 맛없는 경우는 참 드물었는데, 터키에서 맛없는 식사는 이번이 두번째인 듯.
그런데 돈은 가장 비싸다니. -_-;;
특히 물담배가 생각보다 비쌌는데(30tl), 담배를 피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추다.
아니면 여럿이 와서 빨대만 각자 써서 분위기 핑계로 맛만 본다면 모를까, 나는 영 별로였다.
거기다가 좀더 별로였던 건, 자리가 없다고 동양인 혼자 앉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동양인을 내 앞에 앉혔는데, 물론 양해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 사람 앞에 두고 내가 거절을 어떻게 하겠냔 말이지. 것도 절세미녀라도 앉혔다면 모를까,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을 앉히다니 무슨 생각인거냐고. -_-+
나중에 한국인임이 밝혀져 얘기를 좀 했었는데, 95년생이었다. 내 학번 듣고 매우 놀란 것이 틀림 없다. -_-;;
몰랐는데 이 레스토랑과 붙어 있는(주인도 같은) 호스텔이 있나보다. 거기에 묵는데 자기도 물담배 한번 해보려고 나왔다고.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주문한 뒤라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어제가 마지막 저녁 만찬이었으면 훨씬 좋았겠다.
아쉬운 밤을 뒤로 하고 10시 좀 넘어 다시 호텔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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