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2일.
괴레메 마을에서의 첫날은 느즈막히 시작하여 10시쯤 아침을 먹었다.
동굴 호텔인데, 프론트와 식당이 위치한 이곳은 괴레메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창 밖으로 마을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객실들은 경사를 따라 계단으로 이어져 있어, 방마다 높이는 다르다.
조식은 나쁘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키우는 개 한마리가 자주 드나든다. 특별히 꺼리는 건 아닌데, 터키에서 만난 개 치고 성격도 별로인데 - 종종 이를 드러내고 짖다가 직원들한테 혼난다 - 식당에 드나들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좀 신기.
식사를 마치고 한국인 매니저가 있어서 그분과 투어 및 주변 정보 등에 대해 설명을 듣고 몇개 신청했다.
괴레메의 숙소들은 대부분 투어 중계로 추가 수입을 올리는데, 묵은 숙소를 통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다른 데서 투어 신청을 하면 숙소에서 눈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 이 호텔은 아예 예약시에 투어를 다른 곳에서 진행할 예정이면 다른 곳에 묵어달라고 메일을 보내온다. 이런 것을 모르고 와서 다른 곳에서 예약해서 호텔측과 불편한 관계가 되면 서로 좋을 게 없으니, 이 호텔처럼 아예 대놓고 미리 말하는 것도 괜찮은 듯. 물론 호텔은 숙박업이 본연의 주된 서비스이므로, 이런 부가적인 사안으로 손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바람직한 호텔 문화는 아니다. 차라리 여기서 투어 예약시 방값을 할인해주고, 아닌 손님들에게는 제값을 받고 하는 식이 정석이겠다.
카파도키아 여행에 대해 아직 알아본 바가 많지 않아, 오전 시간은 침대서 뒹굴거리면서 주로 앞으로의 여행 준비를 위한 정보 수집을 하면서 보냈다.
일단 신청해둔 투어는 새벽에 뜨는 벌룬 투어, 아침 일찍 출발하는 그린 투어라 오늘은 오후 늦게에만 일정이 있다.
한국인 매니저가 레드 투어는 대중교통 등을 이용해 다녀올 수 있다고 크게 추천 안한다고 했고, 대신 일반적이지는 않으나 이 호텔에서 운영하는 짚사파리 투어를 강추하였으나, 날씨도 비가 자주 오고 해서 일단 보류. 로즈밸리 투어는 어차피 길지도 않고 투어 몇개 예약하면 서비스로 해준다 하여 나중으로 미뤘다.
오후가 되어서야 슬슬 방을 나서서, 손바닥 만한 괴레메 마을을 둘러보고 추천받은 음식점 중 하나인 피데집이 보여 들어갔다. 어제 셀축에서 먹은 피데 생각을 하며 또 들렀으나, 사실 어제 피데 맛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나쁘진 않았음.
느즈막히 점심 먹고 나니 3시가 넘었다.
괴레메 마을 구경은 생각보다 별로 볼 것도 없고 크기도 작다.
이따 저녁 일정은 오후 5시 넘어서다.
그동안 뭘 하지?
일단 호텔로 들어가려다, 호텔 위쪽으로도 길이 나 있었다.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데, 저쪽으로 가면 뭐가 있으려나?
일단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동네 개들 3마리가 격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중 저 가운데 흰놈이 특히 장난기가 많아 보였다.
뒤에 누워 있는 암놈은 이 둘 보단 한 체급 위로 보인다.
그런데 이 개들이 나를 따라오면서 자기들끼리 투닥투닥 거린다.
어느 순간 가만 있던 큰 암놈도 하얀놈에게 맹렬히 달려가 꽤 심하게 장난을 친다.
흰놈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아예 나를 방패삼아 앵겨붙었다. 암놈이 자신에게 달려올 때마다 내가 걷는 다리 사이로 몸을 피하면서 깽깽대며 나한테 불쌍한 척을 했다. 이 녀석, 너 막내냐? ㅋㅋ
흰놈 하는 짓이 얄밉기는 해도, 암놈의 장난도 좀 심하긴 했다. 게다가 진흙 묻은 발바닥으로 내 옷까지 더렵혔다. -_-;
암튼 암놈을 약간 위협(?) 하여 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나는 계속 발걸음을 옮겼고, 흰놈은 암놈이 멀리 떨어졌어도 계속 나를 따라왔다.
눈앞에 시야를 가리던 것들이 사라질 때마다 놀라운 광경들이 계속 펼쳐졌다.
뭐가 있나 궁금함으로 시작된 발길이, 이쯤 되니 멈출 수가 없다.
카파도키아에서는 어디까지가 자연의 흔적이고, 어디까지가 과거의 흔적이고, 어디가 현재 사람들의 삶의 흔적인지 구분이 쉽지 않다. 아직도 동굴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고, 또 호텔 등으로 공사중이기도 하고 그렇다.
온도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햇살은 따갑지도 흐리지도 않은, 차갑지도 끈적거리지도 않았던 바람의 계곡.
모든 것이 다 펼쳐져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야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호텔에서 너무나 가까웠던 이곳에서의 view는, 이후 카파도키아 지상에서 본 모든 풍경들을 통틀어 최고였다.
그런데 왜 호텔에서는 이곳은 따로 얘길 안해주었으며, 가이드북에도 안내가 없었을까?
이름도 없고 사람도 없어도,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곳에서의 기억이 카파도키아에서는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다. 사실은 이때도 이미 짐작했다. 아무리 카파도키아라도 이만한 view가 흔치는 않을 것 같다고.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 자꾸 두괄식이라 김이 좀 새는 경향이 있다. ㅎㅎ 여행은 미괄식이 더 좋은데.
뿌듯해진 마음으로 다시 마을 위쪽으로 돌아와, 호텔 주변을 조금 더 구경했다.
이런 자연의 흔적이자 유적이기도 한 곳들이 수십여개 수준이라면 밖에서만 볼 수 있도록 보존하는 게 정답이겠는데, 카파도키아 같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터키 나름의 기준으로 관리를 하고 있겠지만, 이런 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놀랍다.
오늘 저녁의 일정은 메블라나 세마(Mevlana Sema) 의식 구경이다.
메블라나 세마는 터키에서 내가 꽤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라, 사실 처음 일정을 짤 때에는 세마로 유명한 도시 콘야(Konya)도 일정에 넣으려 했었다. 하지만 콘야를 넣으면 비행기 대신 야간버스 일정이 늘어나고, 콘야가 아니더라도 세마를 볼 수 있는 곳은 많다고 하여 일정에서 뺐던 터이다.
카파도키아에도 세마를 볼 수 있는 몇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한국에 잘 알려진 건 Turkish Night라는 투어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이건 잡탕쇼라, 세마 의식 중 가장 유명한 수피 댄스(Sufi Dance)도 맛배기로 보여주고, 벨리 댄스 및 이런저런 공연과 음식, 술이 어우러져 관객들이 함께 즐기는 쇼라고 한다. 아침에 호텔 매니저에게 Turkish Night도 신청해볼까 한다고 했더니, 이분 노련하게 나의 니즈를 파악하고 혼자 가면 별로 재미없다, 뭘 보고 싶어서 가는 거냐 묻는다. 세마 의식이라고 하자, 역시 그렇다면 세마만 따로 볼 수 있는 훨씬 더 좋은 투어가 있다고 알려준다. 나로서는 아주 고마운 제의였다. 본인도 여기 몇년이나 있었지만 몇달 전에야 처음 가보았는데 아주 좋았다고.
5시 좀 넘어 숙소 앞으로 버스가 왔다. 터키에 놀러와 몇달째 눌러앉아 있으면서 일도 돕고 있는 한국인 매니저 조카분도 가보고 싶다 하여 같이 타고 다녀왔다. 장소는 Kervansaray(예전 낙타로 이동하던 실크로드 상인들이 쉬어가던 숙소) 중 하나인 Saruhan이다. 이곳은 좀 외진 곳에 있는데, 저녁이면 세마 공연을 한다. 건물 규모가 아주 크진 않지만, 그 나름으로도 제법 볼 만하다. 상인들의 숙소이니 낙타들도 쉬고, 도적떼 등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높은 담으로 둘러쌓여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생각보다는 작은 공간, 사진에서 봤던 수십명이 군무를 보여주는 콘야 등의 공연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이다.
대신 세마의식을 행하는 세마젠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분명히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의 성격이지만, 춤만이 아닌 전통 의식 순서에 따라 진지하게 진행되고, 이들이 순전히 돈벌이만을 위해 이 의식을 재현하는 건 아닐 것 같다. 의식 도중에는 사진도 일절 금지된다. 그래도 관광객들을 배려하여 의식이 끝난 후에 안내자가 나와 이제 사진을 찍어도 좋다고 하면, 세마젠들도 이렇게 춤을 추는 부분을 약간 반복해준다.
오른쪽에서 두번째 세마젠은 유난히 앳되 보이는데, 이것이 만약 순수한(?) 쇼라면 일종의 아동 학대 서커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 것 같다. -_-;; 그 정도로 이들이 빙글빙글 도는 횟수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한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입장료(25유로)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사실 이런 공간에 앉아서 어떤 공연을 본다는 것 자체가 호사스런 경험이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 나오면, 얼마 있다 이곳의 조명도 꺼진다.
그리고는 벽쪽으로 프로젝터를 쏘아 또 하나의 쇼를 보여준다.
야외에서 음악/음향과 함께 보면 그 자체로 나름 재미있다.
제법 큰 벽에다 쏘는데, 단순히 만들어둔 영상을 벽에 쏘는게 아니라 그 벽을 십분 활용하여 여러 효과를 보여줄 수 있도록 영상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벽의 문은 실제 영상에서도 문처럼 표현되고, 중간에 이렇게 화면 전체가 벽이 무너지는 효과를 보여주기도 한다.
카파도키아 지방의 옛 역사와 현재, 자연과 인간 등을 아우르며 보여주는데, 싱가포르에서 봤던 Wonder Full 쇼가 떠오른다. 규모나 물량이야 싱가포르 쪽이 압도적이지만, 컨텐츠 내용 면에서는 Wonder Full 쇼가 너무 국가주의적인 느낌이 들어 씁쓸한 맛이 남았었다. (처음 갔을 때는 정면에서 안봐서 내용을 잘 몰랐는데, 싱가포르에 두번째 가서 봤을 때는 너무 오글거렸다.) 그에 비해 이쪽은 훨씬 적은 물량으로 제법 볼만하게 만들었다는 느낌.
아직 해가 짧아서 7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깜깜해졌다.
숙소에 돌아가니 다시 마을로 한참 걸어내려가 저녁을 먹고 올라올 생각을 하니 조금 귀찮아졌다.
오전에 호텔 매니저가 주변 괜찮은 식당들 소개해줄 때 자기네 호텔 식당도 먹을만 하다 하여 한번 가보았다.
항아리 케밥을 시켰는데, 제법 맛있었다! 가격도 20tl이니 비싼 건 아니다.
약간 매콤한 맛이, 사실 개인적으로는 다음날 가본 한국인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항아리 케밥집보다 더 맛있었다.
내일은 벌룬 투어를 위해 새벽 5시부터 나서야 하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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