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루한 운전이 될 것이란 예상은 다행히 완전히 빗나갔다.
우선 길은 상당히 높은 지대로 올라간다.
어제는 수영할 정도 날씨의 해변이었는데, 이곳은 바람도 차고, 눈이 남아 있는 응달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을 둘러싼 산들이 아직도 하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생각외로 이 설산들이 주는 인상이 강렬해서 놀랐는데, 혼자 차를 타고 가다보니 멋진 풍경들에 다양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사실 느낀 감탄에 비해 사진은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다.
탁 트인 데서 오는 감탄이기 때문에 더 그러한데, 아무리 광각이나 파노라마로 찍어도 그냥 그랬다.
그래도 남기는 것이 좋다. 그냥 지나쳐 가면서 눈에다 더 담아가리라! 했던 풍경들, 벌써 기억에서 흐릿하다. ㅠㅠ
내가 직접 운전을 하고 가지 않고서도 그렇게 인상 깊은 길이었을까?
버스 안에서 옆으로만 보았더라면, 그냥 가끔 눈길 주고 차라리 잠을 더 청했을 것이다.
이동의 편리함 때문에 선택한 렌트였지만, 운전에서 오는 즐거움이 너무나 컸던 구간이었다.
터키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차량 왕래가 그다지 많지 않은 길들에도 주유소가 꽤 자주 보였다.
가급적 많이 이동한 뒤에 휴게소에서 주유도 하고 식사도 하면서 쉬어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기름이 거의 바닥날 때까지 그냥 계속 갔다. 내가 빌린 Ford Focus에는 연료 게이지와 함께, 남은 기름으로 갈 수 있는 거리를 계기판에 숫자로 표시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갈 수 있는 거리가 100km 정도 남았을 때, 주유소와 주유소간 거리를 어림 짐작해보니 10km도 안되는 것 같았다. 아직 충분하군 싶어서 보였던 주유소 몇군데를 저기는 식당이 시원찮아 보이는군, 저기는 유턴해야 하잖아 하면서 그냥 지나쳤다.
그러다 이젠 넣어야겠다 싶을 때 발견한 제법 규모도 있고 식당도 커보이는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음? 왜 주유원이 안나오지? 터키 주유소는 대체로 셀프가 아니랬는데?
식당에도 사람이 없네? 잉? 문이 잠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에 급 당황.
지금까지 지나온 그 많던 주유소도 다 연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
만일 도로 한가운데서 연료가 바닥나면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하지? 렌트카 주인 양반이 경찰서 번호가 몇번이랬더라?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려면 여기 위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영어가 통할까? 아님 히치하이킹으로 기름을 사와서 넣어야 하나?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를 머리속에 그리면서 일단 다시 출발.
시속 80km 안되게 경제속도로 달리면서 계기판을 보는데, 차량이 달린 거리보다 남은 기름으로 갈 수 있는 거리가 훨씬 빨리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자주 보이던 주유소는 왜이리 안나오는지! 보인다 해도 또 열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지?
정말 x줄 타는 느낌으로 운전을 하다보니 주유소가 나타나긴 했는데 하필 반대편이다.
지나치며 유심히 살펴보니 차들도 몇대 서있고 다행히 문을 연 것 같다!
몇 킬로쯤 더 가서 유턴하여 주유소 직원들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인다.
위 사진이 그렇게 발견한 주유소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차를 먼저 먹이고 나니 나도 배가 고프다.
그런데 식당이 어째 좀 이상하다. -_-;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식당 규모는 엄청나게 크다.
위 사진 오른쪽으로 저기 보이는 것과 같은 식탁이 100~200석은 되어보였다.
의자도 탁자도 저렇게 천으로 쌓여 있고 그릇들도 쌓여 있어, 휴게소 식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결혼식장 식당 같다.
게다가 메뉴도 따로 없다. 아마도 단체관광객들 대상으로 주로 뷔페식으로 영업하는 식당인 것 같다.
직원이 하나 왔는데 영어가 전혀 안되어서 누군가를 불렀는데, 주인 내지는 총책임자 같아 보이는 사람이 왔다.
어찌어찌 주문은 하였는데, 사실 어떤 음식이 나올지 전혀 예상이 안되었다.
20tl이라니 터키 물가로 싼 편은 아닌데 과연?
좀 기다리니 나온 음식은 이러했다. 맛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터키 음식들이 대체로 입에 잘 맞기는 하나, 단조로운 경향이 있다.
이 식사는 보기에나 맛으로나 꽤 독특한 편에 속했다.
이스탄불에서는 그냥 주는 곳이 별로 없었지만, 관광객들이 적은 곳일수록 차이와 샐러드를 그냥 주는 곳이 많다.
기름과 식사를 다 해결하고 다시 출발.
우려했던 대로 30분 정도 운전을 하고 가다 보니 졸음이 밀려 왔다.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잠을 깨려 하고 있으니, 나보다 먼저 와 서 있던 저 앞차에서 이 커다란 멍멍이가 내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온다.
잉? 이녀석 왜 나한테 오는거야? 먹을 것도 없단 말이야.
주인이 졸려서 잠이라도 자고 있는 걸까? 심심해서 나한테로 온거냐?
내가 별로 놀아줄 생각이 없어보이니 그냥 저렇게 앉아서 계속 쳐다만 본다.
이 이후로 40~50분 정도 더 가서 데니즐리 근처에 가니 매끈한 포장도로가 나왔다.
여기까지는 길들이 멀쩡해 보여도 소음과 진동이 매우 심했다.
하지만 설산들로 둘러쌓인 다소 황량하게 느껴지는 주변 풍경들 사이로 달리던 경험은, 미리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이 길들을 다님으로 하여 자동차 여행에 대한 몇가지 로망이 어느 정도 충족된 것 같다.
꽤 복잡한 도시였던 데니즐리를 통과하여 20여분 정도 더 가면 파묵칼레가 나온다.
파묵칼레는 마을 크기도 그렇고 석회층도 그렇고 책이나 사진 등으로 도저히 감이 안잡혔던 공간이다.
내가 여행지에 대해 미리 공부를 많이 안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도착해서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들이 많은데 비해 그 정보들을 사전에 알기는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도착해서 보니 파묵칼레는 생각보다 작은 마을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잡은 숙소는 석회층 공원까지 꽤 걸어야 했다. 15분쯤? 체크인 할 때 호텔 아저씨가 가방 들어줄 생각도 안해서 약간 빈정 상했지만 다음날 보여준 친절로 다 갚아졌다. 하긴 조식포함 1박 25유로인데, 서비스에 큰 기대를 해서도 안되겠지.
석회층 어떻게 가냐고 물었더니 곧 닫을 시간인데 밖에서라도 보려면 어떻게 어떻게 걸어가라 해서 알려준대로 갔다.
석회층 공원에 가보니 아하, 이런 공간이었구나.
그런데 내가 찍은 사진인데도 사진으로는 크기가 잘 가늠이 안된다.
참고로 호수 주변에도 사람들이 보이지만, 저 멀리 석회층에도 줄지어 내려오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이는 사진이다.
석회층으로 통하는 입구가 이 공원에 붙어 있어서 석회층 쪽으로 들어가볼까 했는데, 석회층-히에라폴리스(둘은 사실상 붙어 있다) 입장권이 25tl이고, 닫을 시간이 30분도 남지 않았다. 내일 다시 보긴 하겠지만, 이동 때문에 일몰 때까지 머물 것은 아니라, 오늘은 석회층 아래의 공원에서 일몰과 야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패러글라이딩은 페티예가 유명하지만, 이곳에서도 하는 모양.
저건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걸 보니 동력이 달려 있는 듯.
보진 못했지만 여기서도 열기구를 타는 모양인데, 이 사진을 찍고 24시간쯤 뒤에 한국인들이 탄 열기구가 파묵칼레에서 추락했다고 기사가 떴다. 자세히 알아보니 추락은 좀 과장이고, 착륙 당시 강풍 때문에 바구니가 옆으로 기울면서 사람들이 다친 듯. 다행히 중상자는 없는 듯.
파묵칼레가 작은 마을인 이유는 이곳의 볼거리가 보통 하루 짜리이기 때문인데, 찾아오는 사람들 수에 비해 이 마을에서 묵고 가는 사람들은 적은 편이다. 대형버스가 사람들을 우르르 싣고 와서 한나절 정도만 둘러보고 다시 차에 태워 떠나는 경우가 그냥 보기에도 많아 보인다.
파묵칼레도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안탈리아 이후 파묵칼레에서 다시 처음 한국인들을 봤다.
숙소나 식당들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글 간판이나 메뉴를 걸어놓은 경우가 많은데, 그런 곳 중 한 곳에 들어갔다.
한국 여행객들 사이에 가장 유명한 집도 발견했었는데, 딱히 그런 곳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 근처의 다른 집으로 갔다.
그곳에도 '닭고기 볶음밥'과 '신라면' 등이 씌여진 한글 메뉴가 있었다.
한식당은 아니지만 터키 와서 처음으로 한국식 비슷하게 먹어볼까 하고 시켜본 닭고기 볶음밥.
아오 @#$^#%^@!#$%!@$# 터키 와서 처음으로 맛없는 음식이었다. -_-;
배가 고팠는데도 절반도 못먹고 남겼다. 심지어는 내가 여행 가면 즐겨 마시는 아이템인 레몬 아이스티도 맛이 없다.
네스티가 아니라 현지 브랜드라 좀 불안하긴 했지만, 물비린내가 나서 두모금 마시고는 남겼다. -_-;;
이날의 음식은 23일간의 여행 중 맛이 없어서 못먹겠던 단 2번의 경험 중 한번이었다.
신라면 시킬 걸.
안타깝게도 내 뒤에 들어온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남자 한명도 나랑 똑같은 걸 시켰다.
말리고 싶었지만 자리가 너무 멀었다. -_-;;
맛없는 식사 한번에 파묵칼레에 대한 인상이 엄청나게 나빠졌다. -_-;;
저녁을 먹고 다시 석회층 야경을 보러 공원으로 갔다.
관광객들은 거의 떠났고, 몇 사람들만이 야경을 보고 있었다.
구경을 좀 하다가 다시 호텔로 돌아가려니 그제야 어두워진 길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
오늘 처음 와서 안내 받아 온 길인데, 석회층 공원이야 큰길에서 다 보이게 크니 찾기 쉽지만, 외진 데 있는 내 숙소로 컴컴해진 다음에 돌아가는 게 만만하지도 않거니와, 아까 낮에도 인적 드문 길들을 지나와야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저런 간판이 보였다.
우리나라에 있는 이불 기업이랑 spell도 같고 로고나 폰트도 비슷한 것 같다.
그 기업의 공장이 여기에 있나? 좀 찾아보니 한국인이 많이 오는 곳이니 나처럼 궁금했던 사람들이 많은 모양.
확실히는 모르겠고, 주로 관광객들 대상으로 장사하는 곳 같다.
터키에선 어딜 가나 떠돌아다니는 개, 고양이들이 많은데, 사람들과 친밀하다.
사람을 겁 안내고, 사람에게 순하기도 하고. (터키 시골의 양지키는 캉갈 같은 개들은 예외.)
특히 개들은 주인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모르겠는 녀석들도 많다.
이 녀석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 녀석이었는데, 석회층 공원 근처에서부터 나를 따라왔다.
가는 방향이 같은 건가 싶어 멈췄더니 나를 지나치기는 했으나, 계속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내가 가는 방향으로 함께 했다. 먹을 걸 기대한 건 아닌 것 같고, 심심했던 건가? 나도 컴컴한 길 가는데 혼자보단 낫겠다 싶어 내버려 뒀다.
이 큰길을 따라 가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서부턴 완전 깜깜이다.
길도 잘 모르겠어서 결국 네비게이션을 켰다.
그러다 정말 컴컴한 길로 들어섰는데, 무슨 개 사육장이라도 있는지 개들이 엄청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니들은 묶여있지 않냐 하면서 가는데, 헐, 갑자기 저녀석 두배는 되보이는 커다란 개가 '우리' 쪽을 향해 맹렬히 짖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_-;;
덤비면 일단 별로 든 게 없으니 그나마 묵직한 카메라라도 휘둘러야 하나? 자리에 서서 살짝 고민하고 있는데, 이때 나랑 이 검둥이의 거리가 4~5미터 정도? 큰 개가 다가오면서 그녀석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검둥이라는 것이 점차 확실해졌다. 또다른 고민, 큰 개가 검동이에게 덤비면 나는 10분간의 인연으로 맺어진 '우정'을 위해 검둥이와 함께 싸워야 할까?
다행히도 큰 개는 맹렬히 짖으며 와서는 검둥이 주변을 돌기만 할 뿐 공격 의사는 없어 보였다.
아예 살랑살랑 꼬리까지 흔든다. 검둥이도 나보다는 이녀석과 더 놀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 고민한 내가 바보다. ㅋㅋ
눈맞은(?) 두 녀석을 뒤로 하고 가는데 영 잘못 든 길 같다. -_-;
결국 다시 돌아서 다른 길로 가는데 거기도 엄청 깜깜 허허벌판.
숙소 주변 가로등길이 보이자 후다닥 걸음을 재촉하여 들어갔다.
파란만장(?)한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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