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entiments/watching

응답하라 1994

by edino 2013. 12. 31.

우선 응사에 대해 쓰려고 하니 전에 썼던 건축학개론이 당연히 떠오른다.

다시 한번 읽어보니, 뭐야 이거 응사랑 건축학개론이랑 쓸 얘기가 똑같잖아! ㅋㅋㅋ


거기 댓글에 댓글로 내가 이렇게 달았었는데, 예언(?)이 실현되었다.


아무튼 이제 우리를 노땅 취급하고 흘러간 세월 그리워하게 하면서 호주머니를 털어갈 컨텐츠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 뭐 386이 지난 한 세대로 분류된 것에 비하면 훨씬 오래 걸린 셈이긴 하지만 말야.



이전에 응답하라 1997은 사실 한두편 보다 말았다. 이유는

첫째, 나는 97학번부터는 별로 친한 후배도 없다. -_-; 심지어, 97학번 이후와는 연애도 해본 적이 없다!

둘째, HOT는 우리 세대가 아니라 얼라들이 좋아하던 애들이다. 토니안? 내가 과외해주던 여학생이 토니안 팬이었는데, 방안에 도배된 사진 보고 진심 궁금하여 "쟤가 잘생긴건가?"라고 물어봤다가 바로 그 여학생 얼굴 굳고 그 달로 과외 잘렸다.

셋째, 정은지를 비롯하여 배우들이 영 호감이 안갔음.


But, 응답하라 1994는 건축학개론처럼 정확히 내 세대를 타겟으로 했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고아라!


2011년에 중국에 출장가서 여직원 둘, 남직원 하나와 넷이 택시타고 가다가 쓰잘데기 없는 얘기들 하면서 서로 어떤 한국 배우가 가장 잘생겼/예쁘다고 생각하는지 얘기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다들 누가 잘생겼/예쁘다 바로바로 튀어나오던데, 나는 이상하게 고민이 되는 거라. 하도 생각이 안나서 어렸을 땐 김희애가 참 예뻤다고까진 했는데 요즘은.... 한참 생각하다 떠올린게 고아라였다. 사실 난 고아라 잘 모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기억도 없고, 얼굴도 잘 생각이 안나고 그랬는데 말이지.




아마 당시 내 머리속에 고아라의 이미지는 이런...



아니면 이런...



아니면... 읭? 자넨 누군가?

나정이 어디 갔어?!?



아 여깄구나.

암튼 그랬던 생각이 나서, 응사에 고아라가 캐스팅 되었단 얘기에 '그럼 한번 볼까?'에 한표 더하게 되었다.


-------------------------------------

어차피 집에 케이블은 따로 안보니 VoD로, 드라마가 절반쯤 진행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yeon과 시청에 돌입.

뭐 사실, 글로 쓰려고 되돌아 생각할수록 드라마로서의 응사는 허접하다.

영리한 기획만 있지, 드라마로 끌어가는 이야기의 힘도 약하고, 웃음도 그냥저냥.

주인공들이 돌아가며 나레이션 하는 것도 연애시대를 떠올리게는 하지만 에피소드들과 그닥 와닿지도 않는 멘트들.

'추억 팔이'도 영화 써니보다 더하면 더했지.

사실 얘기를 만드는 입장에선 얼마나 거저 먹기인가. 옛날 신문 뒤져가며 이것저것 늘어놓기만 해도 '재미'가 되니.

음악도 새로 만들 필요도 없다. 주 시청자들이 다 아는 검증된 좋은 곡들 그대로 쓰면 다들 '아~' 할테니.

그러다보니 편당 길이는 드라마치고 상당히 긴데, 내용들은 참 부실하다.


뭐 이렇게 말은 해도, 응사가 오로라공주도 아니고 욕하면서 본 건 아니다.

오히려 yeon과 주말을 기다려 맥주 몇잔 마시며 보는 재미가 쏠쏠했지.

사실 처음엔 훈남들은 즐비하나 여자 캐릭터는 나정이 외엔 다크포스 충만 윤진이 뿐이라 너무 여성 판타지 아닌가 싶었으나... 나정이의 매력은 다섯 훈남 합친 것을 훨씬 능가했다. ㅋㅋ

정우는 이미 영화 '바람'에서 익숙해진 연기였고, 캐릭터가 워낙 비인간적일 정도로 착하고 별로 갈등 없는 인물이라 개인적으로는 신선도가 좀 떨어졌고.. 칠봉이는 역할에는 잘 어울렸으나 '화이'에 나온 걸 보니 아직 가능성을 말하긴 좀 이른 듯. 삼천포도 역할을 잘 해내긴 했으나 역시 '범죄와의 전쟁', '화이' 같은 쪽에서 벗어나 다양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역시 응사의 일등공신이자 최대 수혜자는 나정이.
살찌우고, 요상한 파마를 하고, 털털하게 입고, 그래봐야 고아라 미모가 어디가랴 싶었는데...
어디 가더라. ㅋㅋㅋ
물론 나중에 취직하고 좀 차려입으니 낫긴 했지만.
하는 짓 때문에 귀엽긴 한데 멍때리고 있으면 무슨 강아지 보는 것 같았다. 견종은 시쮸.

암튼 술취해 윙크 날리는 장면과, 사투리로 욕하며 쓰레기와 싸우는 장면들이 제일 즐거웠다.
특히 거꾸리 선물 가지고 싸울 때. ㅋㅋ

-------------------------------------

내친 김에 고아라 출연작을 죽 살펴보니 정말 빈약하다.

SM 소속이라는데 영화쪽은 영 힘을 못쓰는지.

그중 최근작인 '파파'를 찾아 봤는데....


아무리 고아라 팬이라도 중1 이하 아니라면 가급적 보지 말기를 권한다. -_-;;

이거 SM 기획/제작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아라 밀어주기 영화인데, 심하게 오글거린다.

나정이가 응사에서 추는 춤은 귀엽기라도 하지, '파파'의 고아라가 추는 춤은 분명 멋지게 보여야 하는데...


게다가 보고 나서 안 사실인데, 감독이 무려 (내 인생의 드라마로 꼽을 만한) '연애시대'의 한지승 감독. ㅠㅠ

난 괜찮게 보았지만 흥행은 망했던 영화 '싸움'도 김태희와 설경구를 써서 망했는데 '파파'까지 망했으니 한지승 감독도 앞으로 쉽지 않겠다. 하지만 고아라는 나정이로 살아났으니, 한지승 감독도 멋진 작품 보여줬음 싶다.


-------------------------------------

사실 '추억 팔이'에 거부감이 드는 건 노땅된 기분이 싫어서겠지.

더이상 '현역'이 아니란 게 못마땅한거다.

여기서 응사 기획의 가장 정점은 드라마 마지막회가 방영된 시점이 주인공들(=주 시청자들)이 마흔이 되는 시점이란 것 아닐까.


그래서 나도 마흔이 되었고, 그냥 어쩔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또 그러던데.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일 것 같다고.

응사의 마지막 나레이션에는 그냥 한마디 한마디 다 트집잡고 싶은 말들 뿐인데, 아 정말 한 시대가 갔구나 싶은 기분.


이래뵈도 우린 대한민국 최초의 신인류 X-세대였고, 한때는 오빠들에 목숨거는 피끓는 청춘이였으며, 인류역사상 유일하게 아날로그와 디지털 그 모두를 경험한 축복받은 세대였다. 70년대 음악에 80년대 영화에 촌스럽다는 비웃음을 던졌던 나를 반성한다. 그 음악들이 영화들이 그저 음악과 영화가 아닌 당신들의 청춘이었고 시절이었음을 이제 더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대한민국 모든 마흔살 청춘들에게, 그리고 90년대를 지나 쉽지 않은 시절들을 버텨 오늘까지 잘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이 말을 바친다. 우리 참 멋진 시절을 살아냈음을, 빛나는 청춘에 반짝였음을, 미련한 사랑에 뜨거웠음을 기억하느냐고. 그렇게 우리 왕년에 잘 나갔었노라고. 그러니 어쩜 힘겨울지도 모를 또다른 시절을 촌스럽도록 뜨겁게 살아내 보자고 말이다.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리면 응답하라! 나의 90년대여!


[응답하라 1994 마지막회 중]



결국 마지막회는 2013년의 마지막 날 다시 보았다.

만나이로 쳐서 얼마간이라도 마흔을 거부하려던 생각은 접었다.


하지만 아직도 뭔가 이유를 잘 모르겠는 싱숭생숭한 이 기분, 분명 '응사' 탓도 크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