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기원이라는 아주 건조한 제목만 보고는 이 책을 손에 잡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옛 인류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는 부제를 보니 600여페이지의 두께에도 손이 안갈 수 없었다. 사실 작년에 발견하고 잡았다가, 먼저 봐야 할 다른 책들이 많아 뒤로 미뤄두었던 책이다. 내가 작년에 알았을 뿐이지, 1976년에 처음 나온 책이고 '17년 새 번역본이다.
예전에 책을 무조건 사읽던 시절에는 무조건 정독, 아니면 낮은 확률로 포기(혹은 먼 훗날에 읽기로 봉인) 이었다. 요즘 내 독서는 책에 따라 1)정독 or 2)발췌독 or 3)속독인데, 정독할만한 책이 나오면 아주 힘들다. 흥미롭기도 하고, 곱씹어볼 것도 많고 하여 좋은 책을 만난 것임은 분명하나,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든다.
또하나 요즘 책보며 생긴 습관은 인상깊거나 다시 되새겨보고 싶은 부분들을 digital로 옮겨놓는 것. e북으로 볼 때는 줄긋기로 대신하기도 하지만, 종이책을 볼 때는 OCR 앱을 써서 일단 페이지 별로 찍고,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두는데, 이게 은근히 귀찮고 시간 잡아먹는 일이다. 게다가 책 보는 중간에 하다보니 interrupt도 많이 걸리고.
의식의 기원은 그런 면에서 아주 힘들었던 책이다. digital로 옮긴 부분이 역대 최다 분량. 옮긴 부분을 모두 여기 옮겨두고 공개로 하자니 저작권법 위반이 아닐까 하는 염려도 들어 극히 일부분만 옮겨둘 참이다. 나머지는 비공개로 두고 나만 읽으면 되니까. 법이 다 그렇지만 규정이 매우 애매모호하다.
의식의 기원이라니 아주 난해한 언어로 쓰여있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만 심리학적인 부분보다는 고고학적 부분들이 더 낯설고 방대하여 따라가기 어려운 점은 있다. 이 책은 발췌독+정독을 하게 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내게 덜 흥미로운 중간 부분(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근거들에 대한 부분)은 대충 넘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의 주제는 부제가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옛 인류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매우 야심찬 주장이다. 단지 옛 인류가 그러했다는 데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고, 그랬던 인류가 지금처럼 변화하기까지 언어, 문자, 종교의 기원과 역할을 설명할 뿐더러, 의식까지도 그로 인해 생겨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부터는 모두 저자의 주장이다. 내가 그 주장을 다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매우 흥미로운 의견으로 참고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해보려 하고 있다. 단순화해 말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도를 오도할 우려는 감안하자. 내가 이해하는 저자의 주장이다.
대략 기원전 1,000년까지, 옛 인류의 정신세계는 '양원적'이었다. (저자가 제시한 단어)
이 책의 초반부는 의식의 속성을 '의식은 ******이/가 아니다'의 형식으로 설명한다. 소제목들은 이러하다.
의식은 경험의 복사물이 아니다
의식은 개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은 학습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은 사유에 꼭 필요하지 않다
의식은 이성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명제들을 독자 스스로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돌아보게 하면서 설명한다.
확실히 우리가 할 수 있으나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는 부분들이 많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저자에 따르면 의식이란 지적인 행위/존재에 필수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인간들에게도 이 '의식'은 없었다.
단지 계산하는 우뇌와, '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좌뇌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 시대 인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문헌은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 구약성서 등이다. 물론 이들은 후대를 거치며 여러번 다시 쓰여지면서 후대의 정신세계에 맞게 '오염'되기도 하였지만, 흔적은 충분하다.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의 주인공들은 사유하는 의식이 없으며, 단지 우뇌의 '신의 목소리'를 듣고 의식의 고민없이 행할 뿐이다.
(그리스의 신들이 그토록 '인간적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의 내면의 모습들을 상징하는 것이라서인가? 언어적으로 내면의 감정 등을 묘사할 어휘가 부족하여 그를 대체했던 것인가? 아니, 저자의 의견대로라면 내면의 '목소리'에 대해 이름붙인 것이 그리스의 신들인가.)
고대의 양원적 인간들에게서 의식이 생겨난 것은 언어에 있어 은유로 인한 추상적 개념의 발달에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기술하고 더욱더 뚜렷이 지각하기 위하여 세계의 공간 속으로(시간에 관계없이) 공시적 이동을 수행하는 언어의 모습이다. 그러나 언어는 또한 더욱 중요한 다른 방식, 즉 시간을 통하여 동시적 방식으로 우리 신경체계의 소질구조에 근거하는 경험의 이면으로 움직인다. 은유적 의미가 아니고는 대상을 관찰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들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 추상개념들 역시 은유가 있어서 생성된다.
이것이 내 주장의 요점이요, 심장이요, 골수요, 알갱이요, 핵이요, 정수(精髓)인데 바로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은유인 것이다. (P84)
그리고 '신의 목소리'가 가지던 권위는 문자의 발달에 따라 급격히 축소된다. 문자는 목소리처럼 즉각성을 띄지는 않으나 전달에 한계에 있어 목소리를 압도한다. 또한 양원적 왕국은 개인화된 유사 '나'들의 타협이라는 장치가 존재하지 않아 취약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양원적 문명을 붕괴시키는 원인이었다.
요약하면, 나는 양원적 정신에서 의식으로 급격하게 변동하는 데 작용했던 몇몇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스케치했다. 1) 문자쓰기의 도래와 함께 청각성의 약화, 2) 환각적 통제가 지니는 내재적 취약성, 3) 역사적 대격변의 혼동 중에 신들의 속수무책, 4) 타인들에게서 상이성이 관찰될 때의 내적 원인 가정하기, 5) 서사시로부터 이야기 엮기의 습득, 6) 기만의 생존적 가치, 7) 약간의 자연도태. (p298)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이 책이 양원적 인간이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변화하게 되는 모든 과정에 대한 빈틈없고 명확한 설명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문헌과 유물들, 심지어는 역사에서도 그 중간단계의 근거들을 가져온다. 더이상 들리지 않게 된 '신의 목소리'를 찾아 헤매며 생겨나 발달한 것이 종교이고, 의식들이다. 양원적 정신의 붕괴 시기에 나타난 가장 의미심장한 그림은 아시리아의 위 그림이다. 왕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심지어 그 앞에 무릎꿇은 보좌가 텅 비어 있다. 그 시대의 유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다.
나의 신은 나를 버리고 사라지셨다.
나의 여신은 나를 돌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
내 곁에서 걷던 선한 천사도 떠나버렸다. (p302)
잉카제국의 멸망도 양원적 문명의 취약성이 원인이었다고 본다. 사실 이 시기의 잉카제국은 양원성은 쇠약해가고 있으나 주관적 의식이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지는 못한 왕국이었다.
천연두같은 전염병이나 압도적인 무기 등이 한 원인으로 얘기되기는 해도, 신적인 권위로 통치되는 문명이 아니고서야 단 150~200여명의 병력이 남아메리카 상당한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한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있는 문명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이미 쇠약해진 양원성 때문에 그들의 신은 침묵하고 있었고, 침략자들의 외양은 그들에게 신처럼 보였다. 특히 황제가 먼저 사로잡히고 나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학살당하였다. 당시 현장에 6천명의 병력 중 4천명이 죽었으나, 스페인군의 전사자는 0이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는 당시 병력들에게 전투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밖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결과다.
정말로 고대 인간들에게 의식이라고 할만한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는지는 확실히 모를 일이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적어도 의식의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약한 정신세계로 여겨지는 부분들이 역사에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만 보아도, 그것을 짓겠다고 마음 먹는 황제나, 그것을 지어내는 이집트인들이나, 신의 목소리를 듣는 황제와 신적인 권위가 지배하는 집단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유적이다.
책의 후반부는 현대에까지 남아있는 양원정신의 흔적에 대해 다룬다.
부분 또한 매우 흥미롭다. 후반부에 옮겨온 부분이 가장 많다.
몇가지 인용으로 대신한다.
최면현상이 집단 인지적 규범이나 집단 믿음 체계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은 그것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로 입증되었다. 최면에 대한 믿음이 변함에 따라 그 내용도 변했다. 메스머 이후 몇십 년이 지난 뒤 환자들은 더는 이상한 감각이나 발작으로 몸이 뒤틀리지 않았다. 그 대신 최면 중에 질문에 대답하고 스스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이런 일이 관찰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19세기 초반에 환자들은 최면 기간에 일어났던 일을 잊기 시작했는데 전에는 이런 사례가 보고된 적이 없었다. 1825년경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병을 스스로 진단하기 시작했다. 그 세기 중반에, 두개골의 형상이 정신적 능력을 나타내준다는 골상학이 유행하면서 최면까지 잠식했다. 최면 중에 골상학에서 지정된 어떤 영역에 압력을 가하면 환자가 그 영역이 통제하는 능력을 나타냈는데(그렇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 현상은 그전이나 후에 다시 관찰되지 않았다. '경배'를 담당한다고 가정된 뇌 영역의 두피에 압력을 가하면 최면에 걸린 환자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럴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p509)
현대의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런 문화를 찾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주관적 의식의 일부분을 갖고 있어서 더 원초적인 정신 조직에 저항하며, 환각이 통제해야만 하는 정신 구조 속에서 어떤 통제력을 행사하려고 애쓴다. 결과적으로 그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신을 기다리며 자신의 환경에 알몸으로 나앉은 정신이다. (p569)
자연도태에 따른 진화론은 양원 시대의 무의식적 심연으로 되돌아가 맞딱뜨리게 되는 거룩하고 위대한 이, 즉 엘로힘이 창조한 피조물로 떠받들어 온 고귀한 인간이라는 전통에 조종을 울렸다. 한마디로 밖에는 그 어떤 권위자가 없다고 말해준다. 보라!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할 수밖에 없다. 아이난의 왕은 헤르몬 산을 바라보는 일을 중단하고, 이제 죽은 왕은 마침내 진정으로 안식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1,000년 말미에 있는 연약한 인간종인 우리는 우리에게 스스로 권한위임을 해야만 했다. 두 번째 1,000년의 말미에서 세 번째 1,000년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이 문제로 둘러싸여 있다. 이것은 새로운 1,000년이 혹 천천히, 혹 빠르게 아마도 우리 정신체계에 또다른 어떤 변화를 일으키며 해결해나갈 것이다. (p577)
후기는 저자가 책을 처음 쓰고 12년 뒤에 덧붙인 것이다.
나는 지나간 정서와 미래의 정서에 대한 의식을, 실제로 우리가 쓰는대로 감정(emotion)이라 부르겠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양원적 인간이나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현대인들에 대한 2단계 감정 이론이다. 포유동물에게는 기본 정서가 있고, 이어서 우리의 감정이 있는데, 후자는 전자에 대한 의식으로서 과거와 미래가 있는 한 개인적 삶의 정체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후자는 멈추어 설 어떤 생물학적으로 진화된 기제가 없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P605)
이러한 정서가 감정으로 발달한 대표적인 예시는 공포가 불안으로, 부끄러움이 죄의식으로, 짝짓기가 '섹스'로 발전(?)한 것이다.
잘못된 행동이나, 달리 표현하면 죄나, 아니면 들통날 경우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적어도 쫓겨나게 할 듯이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과거로부터 어떤 것을 기억나게 하며 미래에 대해 걱정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죄의식이다. 기원전 1,000년 이전에는 집단이나 사회가 공유한 수치심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p609)
이에 대한 근거는 기원전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오디세우스 아들 텔레고노스와 그로부터 약 400년 뒤에 나온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인물들의 반응의 차이이다. 똑같이 모르고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였는데, 나중에 그걸 알고 나서 둘의 반응은 천지 차이라는 것이다. 텔레노고스는 수치심은 느꼈으나 극복(?)하고 잘먹고 잘사는데 반해, 오이디푸스에게는 재앙이 닥친다. (잘 몰라 찾아보니 두 인물들간 사정에 차이는 있다. 모르고 친아버지를 죽인건 같은데, 오이디푸스는 친엄마와 엮였으나 텔레노고스는 친엄마랑 엮인 건 아니다. 단지 친아버지의 부인일 뿐. -_-;;)
동물에 대한 연구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리 짝짓기는 배고픔이나 갈증처럼 (의식 때문에 그렇게 보이기는 하지만) 축적되는 필연적인 욕구가 아니고 아주 특정한 자극에 촉발되기를 기다리는 정교한 행동 패턴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짝짓기를 의식할 수 있게 되고, 과거의 짝짓기를 회상할 수 있고 미래의 짝짓기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더 친숙해 보이는 세계다. 성에 대해 공상(fantasize)할 수 없다면 당신의 '성생활'이 어떨지 상상해보라. (p611)
이에 대한 근거는 기원전 1,000년 이전의 양원적 세계의 유물들은 성적인 내용을 담은 것이 거의 없으나, 그 이후의 유물들에서는 성적인 내용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튼 끝까지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읽는 과정이 만만치는 않지만.
한글판 위키피디아의 줄리언 제인스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러한 논쟁 또한 매우 흥미롭다. 개념과 그에 대한 언어가 없었을 뿐인가, 아니면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없다는 의미인가.
일찍이 네드 블록은 제인스가 의식의 출현과 의식이라는 개념의 출현을 혼동하였다고 비평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내내 의식이 있었지만, 의식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글로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니얼 데닛은 돈, 야구, 의식 같은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한 개념을 갖지 않고서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고 반박했다.
나는 의식과 언어는 같이 발전했을 것이고, 이것이 고등 지능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저자 또한 의식의 기원을 언어의 발달에서 찾고 있으나, 고등 지능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어느 정도의 고등 지능이냐의 문제겠지만, 지금과 같은 정도의 문명의 발달은 양원적 정신체계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 언어는 의지로 머리속에서 반복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기억과 학습을 강화하는 역할도 할 것이다. 적어도 인간 문명 발달에 있어서는 그 세 가지가 우연히 같이 발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의식의 발생은 고등지능의 발전을 위해서 정말 불가피한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인간의 발달 혹은 진화에 있어, 의식은 잠시동안만 존재하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AI의 도움 없이 인간의 문명이 더 발전하기는 힘든 단계도 올 것이고, 그때 마블에 나오는 크리족의 슈프림 인텔리전스같은 AI, 아니면 또다른 SF들에서 다뤘던 형태의 집단지성체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진화적으로 볼 때 그러한 체계는 환경의 변화에 취약할 것이나, 인간이 환경에 의존적으로 지구에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이 창조하는 환경에서 살게 되는 때라면 또 모를 일이다. 자신의 체계 외에는 환경도, 다른 개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유일한 지성, 그는 스스로 그 세계의 '신'이겠다. 혹시 있을지 모를 다른 '신'을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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