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no 2024. 3. 3. 21:12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 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언제부턴가 긴 호흡이 부담스러워서인지 장편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는데, 책 소개에서 이 책의 첫부분을 보고선 손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줌의 유명인들 외에 대부분 사람들(사실 대부분의 일시적 '유명인'들도) 앞에 놓은 운명은 이와 같기에... 아니 그래도 이 사람은 대학교수 씩이나 되었고, 책도 냈고, 형식적이나마 대학에 명판이라도 남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보다도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럼 이 소설을 쓴 존 윌리엄스는 어떨까. 읽기 전 책 소개에서 보아하니 이 책은 소위 '역주행'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잊혀진 소설이 되살아난 건 아닌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후로, 다 읽고 여기에 소감을 남길 때까지, 이 책과 작가에 대해서는 더 찾아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부디,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글을 더 읽지 말고 책을 먼저 보길 권한다.

읽은 사람이라면 같이 어땠는지 얘기해보면 좋을 것 같다.

 

---------------------------------

 

(이하 스포일러 매우 많음)

읽은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전날 본 영화 결말도 잘 기억이 안나는 것에 비하면(와인 탓도 크겠지만) 이 소설은 아직도 생생하다. 매우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흥미로울수록 책을 읽는 속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이 책도 그리 긴 분량이 아님에도 3주에 걸쳐 읽었다.

 

스토너가 불행했다면 그 80% 정도는 이디스 때문일 것이다. 지난했던 어린 시절과 부모, 반평생을 괴롭힌 로맥스나, 그로 인해 조교수 이상 못올라가거나 한 건 그에 비하면 불행이라기보단 성가신 일 정도 아닐까. 스토너와 이디스, 첫눈에 반한 여성과 어색하고 서투르게 결혼까지 이어진 이 둘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는, 참으로 기괴한 첫날밤(아니 둘째날밤이던가) 이야기가 암시하듯, 참혹한 실패였다.

 

하지만 이디스를 비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녀 역시 이상하게 비틀린 가정과 교육의 산물이었을 뿐, 그리고 스토너랑 너무도 안맞았을 뿐. 여러 곳에서 스토너는 이디스의 '진심'에 경악하고 절망하였다. 로맥스에게는 또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나는 스토너 소설을 학습시킨 ChatGPT에게 이디스와 로맥스 각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써달라고 해보고 싶었다.

 

스토너가 행복했다면 50%는 영문학, 20% 정도는 캐서린 드리스콜 때문일 것 같다. 스토너의 부모의 삶에 비하면 그의 인생은 어쨌든 영문학으로 구원받았다. 어쨌든 대학으로 이끌어준 부모 덕분이지만, 그 뜻을 저버린 첫 일탈은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했던 이디스와의 관계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실히 알고도 그저 평생을 견디기로 한다. 책임감일까, 아니면... 13장 첫 머리에 그의 생각들의 변화가 나온다.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그 깨달음을 준 캐서린 드리스콜은 어떤 입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스토너의 '희생'에 대한 완벽하지만 짧은 보답같이 느껴진다. 이디스 또한 그 관계를 알면서도 더없이 무심하게 넘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소설이 영화라면 어떤 모습일지 가장 상상이 되는 캐릭터는 드리스콜이었다. 드리스콜은 드라마 Loki에서 라보나 렌슬레이어 역을 맡은 구구 음바타로(비록 시대상 흑인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친구인 고든 핀치 역엔 오펜하이머에서 어니스트 로런스역 맡았던 조쉬 하트넷이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주인공 가족 스토너, 이디스, 그레이스는 오히려 유령같아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이디스가 아이를 원하고 임신하기까지의 장면들 또한 기묘하다. 그 일로 인하여, 불행은 둘만의 것이 아닌 또 한사람의 것이 된다. 딸 그레이스는 그의 삶에 15%정도의 행복과 15%정도의 불행일까. 그레이스가 그에게 준 불행은 이디스 몫이 대부분이겠지만. 스토너를 닮은 또다른 영혼은 이디스와 더 지독한 운명으로 맺어져, 예정된 절망적인 운명을 밟아나간다.

 

소설 시작부터 그의 운명을 요약해서 서술하고 시작하였으니,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되고 하는 건 사실 이 책에서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중간중간, 무심하게 적힌 문장들이 그의 나머지 인생에 일어날 일들을 철렁하게 선고한다. '그 뒤로 20여 년 동안 두 사람은 다시는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라거나, '캐서린 드리스콜과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라거나, 더 이상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도록, 툭.

 

선택들이 모여서 삶이 되고, 어떤 선택은 인생을 좌우하면서도 되돌리기 어려운 선택이 되기도 한다. 스토너 본인은 그저 견디지만, 옆에서 보는 이가 오히려 이디스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나중에라도 캐서린 드리스콜과 새로 시작하였더라면, 하는 가정을 자꾸 해보게 한다. 부모의 뜻을 져버리고 농과대를 가지 않고, 친구들의 기대를 져버리고 자원입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던 걸까.

 

---------------------------------

 

삶에 막바지에, 스토너는 스스로에게 여러번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무겁더라도, 가끔씩 조금 더 일찍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좋을 질문일 것이다.